일본의 다도 문화는 전국시대 말기, 다도의 성인이라 불린 센 리큐의 등장으로 절정에 이른다. 다도 모임은 단순히 차를 마시는 자리가 아니었다. 와비·사비의 미학이 깃든 공간, 정성스레 고른 다구(茶具), 도코노마에 걸린 그림이나 꽃꽂이 같은 예술품까지 함께 감상하며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명상의 시간이기도 했다.
점차 다도는 귀족과 무사들에게 필수 교양으로 자리 잡았고, 유명한 다도 모임은 정치적 성격을 띠기까지 했다. 다도 명가가 속속 생겨나던 이때, 황실 과자점 토라야는 누구나 주문을 넣고 싶어 하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귀한 차와 값진 다구, 그리고 토라야의 특별 주문 과자는 다도 모임의 품격을 한층 높여주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바로 이 시기, 토라야에는 운명을 바꿀 변화가 찾아온다. 오늘날 간판 상품으로 자리 잡은 **양갱(羊羹)**이 이 무렵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양갱’이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 기원은 전혀 달랐다. 원래 중국과 몽골에서 양갱은 양의 피를 굳혀 만든, 블랙푸딩이나 순대에 가까운 음식이었다. 하지만 불교의 영향으로 살생을 피하던 일본에선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탄생한다. 팥과 한천, 설탕을 넣어 굳혀낸 달콤한 과자로 변모한 것이다. 이 새로운 양갱은 달달한 맛 덕분에 다도 모임에서도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인기에 불을 붙인 건 다른 이유도 있었다. 설탕과 한천으로 단단히 굳힌 양갱은 보존성이 뛰어나, 말하자면 당시의 에너지바로 쓰이기 좋았다. 전국시대의 혼란 속, 군수 물자로 대량 주문이 들어왔고, 토라야 역시 이 흐름을 놓치지 않고 양갱 생산에 뛰어든다.
이즈음 토라야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양갱, **‘밤의 매화(夜の梅, 요루노우메)’**가 처음 기록에 등장한다. 지금의 양갱과 동일한 것이라는 설도 있고, 단순히 이름만 같은 다른 화과자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건 토라야가 양갱 경쟁에서도 다른 과자점을 압도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마침내 전국의 혼란이 끝나고 에도 막부가 세워지자, 토라야는 또 한 번의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