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시대의 토라야는 천황이 쇼군에게 보내는 선물용 과자를 만드는 영광을 누렸다. 그중에서도 5대 쇼군 쓰나요시와 8대 쇼군 요시무네에게 보낸 과자는 지금도 토라야가 자랑하는 역사의 한 장면이다.
1697년, 쓰나요시에게 바친 과자는 특별히 2단으로 제작된 고급 상자에 담겨 있었다고 한다. 내용물은 모두 마른 건과자였고, 양갱은 들어 있지 않았다. 아무리 보존성이 뛰어난 양갱이라 해도, 몇 달이 걸리는 긴 여정을 무사히 버티기에는 당시의 기술로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쓰나요시가 집권하던 시기는 화려한 겐로쿠 문화가 꽃을 피운 에도 막부의 전성기였다. 호사스러운 것을 좋아하던 그는 토라야 과자에도 흡족해했다. 특히 달콤한 반죽 위에 깨를 씌워 네모 반듯하게 자른 과자를 즐겨 먹었다고 전해진다. 반대로 근검절약으로 막부를 다시 일으킨 요시무네는 토라야의 화려한 과자보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먹던 소박한 콩가루 떡을 더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토라야는 중대한 판단 착오를 한다. 쇼군에게 바친 과자가 에도에서 입소문을 타자, 부유한 다이묘와 상인들까지 교토 본점에 주문을 넣기 시작했다. 주문이 점점 늘어나자 토라야는 기회라 생각했다. “에도에 지점을 내도 손해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신바시 부근에 토라야 에도점이 문을 연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상황은 거꾸로 흘러갔다. ‘교토 궁중의 과자’라는 호기심이 사라지자 주문은 오히려 줄어들었고, 정식으로 쇼군가 납품업체가 되려 하자 이미 에도성에 과자를 공급하던 기존 과자점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교토 본점의 토라야가 에도의 쇼군가에까지 발을 들이려 한다는 사실은 쇼군의 마음마저 불편하게 만들었다. 결국 토라야는 쇼군가의 공식 납품업체가 되는 데 실패했고, 에도점마저 철수해야 했다.
화려하게 뻗어나가던 길 위에서 마주한 뼈아픈 좌절. 토라야는 그 뒤로 메이지 시대 천도까지 오직 교토를 거점으로 삼아 명맥을 이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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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토라야는 잘못된 판단을 한다.쇼군에게 바친 과자가 에도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에도의 부유한 다이묘와 상인들도 토라야의 과자를 먹어보려 교토의 본점까지 주문을 넣는 경우가 늘어났던 것이다 점점 늘어나는 주문을 본 토라야는 에도에 지점을 내도 징사가 되겠다는 판단을 하고 지금의 신바시 부근에 토라야 에도점을 낸다. 그러나 쇼군이 드신 교토의 궁중과자라는 호기심에서 시작된 주문은 에도에 지점을 내자 오히려 줄어들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정식으로 쇼군의 과자점으로 인정받기 위해 움직이자 이미 쇼군을 위해 에도성에 과자를 납품하던 에도의 과자점들이 크게 반발하는 일이 일어난다. 교토에 본점을 둔 과자가 에도의 쇼군가에도 납품하는 업체가 된다는 것에 쇼군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심기가 불편해진 결과 쇼군가에 공식적으로 과자를 납품하는데 실패한 토라야는 에도점을 철수하고 이후 메이지 시대에 도쿄로 천도를 하기까지 줄곧 교토를 기반으로 사업을 하게 된다 승승장구하던 토라야의 뼈아픈 실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