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
까만 어둠은 내게 까만 눈동자를 주었다
그러나 나는 이를 통해 빛을 찾아낸다
黑夜给了我黑色的眼睛 / 我却用它寻找光明
-꾸청(顾城,1956-1993) 은 1956년 9월 24일, 북경에서 태어났다. 문혁이 일어나던 해인 1969년에 비판을 받아 산동성 광베이廣北농장으로 쫓겨간 아버지 꾸공顾工을 따라 그는 12세에 학업을 중퇴하고 돼지를 키웠다.
1973년부터는 그림을 배우다가 1974年 북경으로 돌아와 운반공과 목공일을 하며 가끔 차출되어 편집을 도우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문혁이 끝나면서 1980년 초 직장은 해체되고 한 때 표류생활을 하면서도 21세인 1977年《민들레蒲公英》라는 시를 발표하여 각광을 받았으며 24세이던 1980년엔 《별들(星星)》이라는 잡지에 <一代人>이란 시를 발표, 역시 시단의 강렬한 반향과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몽롱시파의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베이징문예北京文艺》、《산동문예山东文艺》、《소년문예少年文艺》등에 시를 발표하며 80년대 주류를 이뤘던 <<몽롱시>>파의 아이 칭艾 青, 수 팅舒婷에 이어 3대 대표시인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1985년 그는 중국작가협회에 가입, 87년엔 구미문화교류방문단에 끼어 창작 강의 활동을 하다가 88년엔 뉴질랜드로 가서 중국고전문학을 가르쳤으며 오크란 대학의 아시아언어 연구원으로 초빙,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누렸지만 곧 사직하고 섬으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했다.
한편 1992년, 그는 독일학술교류중심(DAAD) 창작기금을 받으며 잠시 독일에서 시작생활을 시작했으나 현실과 이상사이의 갭을 허물지 못한 그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결국 그마저 사직하고 뉴질랜드 북방의 한 작은 섬으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했다.
그러나 근 일 년 만에 생활고와 심약한 그의 정신상태 등을 이유로 그의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자 1993年10月8日 급기야 아내를 도끼로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
당시 이 사건은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많은 매체에선 “꾸청이 도끼로 부인을 살해하다”라고 보도하면서, 동화시인이었던 그가 악마에 의해 정신이상을 일으켜 살인자가 되었다고 했다. 물론 사후 일부 그 누명은 벗겨졌지만 (꾸청의 누나 꾸샹顾鄕은 “꾸청최후의 14일”이라는 기획물에서 말하길, 도끼는 우연히 그 장소에 있었을 뿐이며,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그 참혹한 사건은 중국인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몇 달 전인 1993年 3月 그들 부부는 중국으로 귀국하여 가족과 문인들을 만나고 다시 독일을 거쳐 뉴질랜드로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한편 1993년 12월22일 뉴질랜드 경찰국을 통해 중국영사관에 전달된 그의 유서는 모두 네 통이었다. 부모님에게, 엄마에게, 누나에게, 아들 무얼木耳에게,..!
이 유서들은 사건현장에서 경찰이 취합했는데, 통합해서 보면, 그는 길이 끊어진 막다른 곳에 스스로 몰려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어린 아들木耳(三木Sam)에게만은 눈물을 보이며 아빠를 이해해달라는 문구가 있었다. 꾸청은 사진과 원고 등을 누이에게 부탁했으며 굳이 보관하지 않아도 되며 집이나 그 밖의 것 역시 아들에게 굳이 남기지 않아도 된다고 전했다. 그러나 사후 모든 원고나 모든 꾸청의 것들은 자연스레 누나가 보관, 최근 꾸청의 사후 50년에 즈음하여 북방문예출판사에서 4권의 “꾸청문학계열顾城文学系列”을 냈는데 그 첫 권《꾸청문학선: 다른 세계 顾城文选别有天地》은 꾸청이 1987년 5월 독일 밍스터明斯特에서 가진 “국제시축제”에 참가하면서부터 1993년 10월 8일 그의 아내와 한 섬으로 도피했을 때까지 쓴 작품들을 “꾸청의 성顾城之城”이라는 웹싸이트의 장샤오민江晓敏과 함께 편집한 것이다. 총 150만 여개의 문자로 산문 및 시를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