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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 Aug 12. 2020

우리 고모가 결혼을 했다

나에게는 엄마가 떠난 것과도 같은 일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대가족 속에서 자랐다.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빠, 고모, 동생, 그리고 나까지 모두 일곱 식구였다. 나는 우리 가족들 중에서 고모를 제일 많이 좋아했었다. 엄마 말로는 신발을 엄마가 신겨주면 막 벗어던지며 고모가 신겨줘야 한다고 떼를 썼단다. 엄마는 박한 시집살이에, 고된 농사일에, 집안일로 늘 바쁘셨고 그래서 몇 안 되는 따뜻한 기억들은 할머니나 고모가 안아준 기억 혹은 그 비슷한 느낌들 뿐이다. 할머니 등에 업힌 기억이 어렴풋하고, 고모는 다정하게 놀아주셨다. 아마도 고모는 엄마와 비슷해 보이는 나이대라서 할머니보다 고모를 마치 엄마처럼 여겼지도 모르겠다.


내가 살던 곳은 초등학교까지 꽤 거리가 멀어 아이의 걸음으로 40분이 족히 걸리는 거리였고, 버스를 타면 두어 정거장 5분 남짓 타면 되지만 그 정류장까지 가는 길이 20분은 걸렸다. 그 길에는 마당에 개를 풀어놓는 집들도 있었고, 시골은 한 시간에 3~4대 남짓으로 버스가 자주 다니지도 않아서 옛날 그때에는 학교 가는 것도 꽤 일이었다. 그런 나의 등하교를 도와주는 일 고모 담당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모는 무려 대학교를 나온 백수였다. 그럼에도 할머니, 할아버지께는 두 아들 아래 막내딸이라 그런지 집에서조차 별다른 일을 하지도 않아도 괜찮았다. 그러니 조카들과 놀아줄 여유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고모가 학교 숙제도 도와주고, 나름 영문과를 나오셔서 영어도 조금 가르쳐주고, 어느 날은 갑자기 멜로디언과 바이엘 책 한 권 사다주시기도 했다. 피아노 학원 근처에도 못 가 본 나로서는 그게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어지러울 정도로 멜로디언을 불면서 두 손 연주를 해보곤 했었다.



그런 고모가 시집을 갔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초등학교 3학년 즈음인 것 같다. 10 무렵, 좀 컸다면 컸고 아직 어리다면 어린, 지금 내 딸의 나이쯤.. 우리 엄마가 들으면 굉장히 섭섭하시겠지만, 그때 나에게는 '엄마와도 같았던' 고모가 떠나버린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것도 하필 아주 먼 지역으로.. 멀미가 나서 버스도 잘 못 타는 나인데.. 노처녀였던 고모의 결혼식날은 경사 분위기였고, 나도 같이 신이 나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 뒤로 매일같이 고모가 보고 싶어서 울게 될 줄도 모르고. 안 그래도 등교거부가 심했던 내가 아침마다 더 심하게 울고불고하며 학교를 안 간다고 주저앉게 될 줄도 모르고. 헤어짐이 두려워서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고 살아가게 될 줄도 모르고 말이다.


대학원에서 심리치료 수업을 들을 때 내담자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다고 하면 "언제부터 그는지"를 물어야 한다고 배웠다. 왜냐하면 그 시점의 사건이 미해결과제로 남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두 태어나서 처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기들은 일찍이 '아니'라고 하는 법을 배우고, 태어나면서부터 울어서 불편한 걸 표현할 줄 안다. 그런 힘이 원래 있다. 그런데 부모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험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 표현하지 않게 된다. 자기주장을 그만두고, 울음을 울지도 않게 되고, 반항 하든 순종만 하든지  부적응하기 시작한다. 부모 아닌 트라우마 사건을 겪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아마 나에게도 그 시점이 있었던 것 같다. 고모 때문에 울다가 더 이상 울지 않은 그 시점. 슬픔을 깊숙이 묻어버린 그 시점.


아마도 고통 때문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슬픔이 감당이 안 되어서 무의식 속에 닫아버린 이유는.. 누가 어떻게 달래주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가 않는다. 분명 처음엔 좋게 달래주셨을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잖니' 식의 말들에 내가 달래지지 않고 계속 울고불고하면 종국에는 "그럼 어쩌란 말야!!" 하면서 아빠가 나에게 화를 내신 기억이 있다. 생각해보면 그렇지, 엄마가 시집간 것 아니고 고모가 시집간 거니까.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그땐 놀이치료도 Wee센터도 아무것도 없던 시절인 데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갑자기 선생님이 전근을 가신다고 해서 반 아이들 모두 울고, 나도 울고, 집에 와서 엄마에게 선생님 전근 가신다는 말을 전하면서도 또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엄마가 분명 어떤 식으로든 위로를 해주려고 하신 것 같은 느낌이 남아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그다음 날 선생님과 작별인사를 할 때에 눈물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반 아이들 모두 우는데 나만 울 수가 없어서 당황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그 뒤로부터 머리로만 살았다. 어떤 상황들이 이해는 가는데 마음으로 슬픔이 느껴지지 않고 자꾸만 빠져나왔다. 당연히 사람들 앞에서 우는 일도 없었다. 가끔 혼자 삐질삐질 한 적이야 많지만..


반에서 고립됐다가, 친한 친구와 너무 밀착되려 하고 성에 차지 않으면 절교했다가, 그런 일들을 겪으며 아예 마음을 닫고, 겉으로만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다.

언제든 날 떠나가도 괜찮다는 태도로.. 

내가 버림받지 않기 위해 사람들을 버려가면서.. 

외롭게...





사람들과 연결이 없고 슬픔이 없는 건 <죽음>에 대해서도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난 아무렇게나 죽어도 괜찮았다. 완벽주의적으로 할 일을 다하며 책임감 있게 행동했지만 내가 소중하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도 배려하며 친절하게 대했지만 그 관계를 소중하게 이어나가려 노력하지는 않았다. 난 늘 혼자이기를 자처했다.


그러던 내가 내 마음을 돌보기 시작하면서 고모에 관한 이슈는 계속 걸려 나왔다. 비록 심리상담을 받았을 때 이 일을 직접 다룰 기회는 없었지만, 그 후에도 이슈는 계속 혀끝에서 맴돌았고, 다시 상담을 받지는 못 해도 몇 년 전부터 나 스스로 이 일을 마음속에서 피하지 않고 떠오를 때마다 충분히 슬퍼해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더 이상 그 일에서 도망가는 것 지쳤다.


지금의 어른이 된 내가 그때의 열 살도 안 된 나를 얼마나 힘들었겠냐며 위로했다. 그때의 나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고.. 얼마나 아팠으면 마음을 그리 닫고 괴롭게 살았겠냐며.. 계속... 계속.. 또 계속... 찢어질 것 같은 심장을 견디고 머물러본다.


'슬픈 일이었구나.'


사실 그전까지 나는 '슬프다'라는 단어를 쓴 적이 거의 없었다. 무의식 속에 잠금 되어 있었기에. 나는 이렇게 십수 년 전 애착의 상실을 이제야 드디어 애도하였다.

여기에 다 담을 수 없이 혼자 흘린 수많은 눈물들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일이다.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그 느낌이 되살아나면서 나는 요즘 <죽음>이 너무나 두렵기 시작다. 나의 죽음은 주위와 연결되어 있었다. 때로 누군가의 죽음이 나는 가눌 수 없이 슬프다. 그만큼 사람들이 소중해졌다. 특히 내 아이.. 그 전에는 아끼고 사랑한다고 해도 그냥 이쁜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아이가 없으면 절대 안 될 것 같 절실함이 있다. 전에는 내가 아니어도 더 잘 키워줄 사람 있으면 부탁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면, 지금은 내가 노력해서 더 잘 키우고 꼭 함께 살아가고 싶다는 애착으로 바뀌게 되었다, 왜냐하면 엄마가 없어지면 아이는 얼마나 슬프고 그리워할지 너무나 잘 아니까. 감정빠진 퍼즐을 찾고 나서 그동안 이를 키우며 해할 수 없었던 마음을 드디어 공감할 수 있었다.


이제는 사람들에게 먼저 연락도 하고 대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려는 생각도 든다. 죽는 것이 두려운 만큼 살아가는 것의 무게도 느껴진다. 언제든 잃을 수 있기에 지금 가진 삶이 소중하다는 것을, 아마 부모와 건강하게 애착을 맺고 건강하게 분리되어 봤다면 진작에 배웠을 것들을, 나이 삼십이 한참 넘어서 겨우 배웠.


앞으로 살면서 새로이 누군가를 만날 일도 또 이별할 일도 많을 것이다. 너무나 소중한 가족들과도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겠지. 그 아픔이 얼마나 클지는 감으로 안다면 안다고도 하겠지만 아마 막상 겪어보면 훨씬 더 아플 테고, 그러니 내가 할 일은 마음을 열고 지금 더 열심히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슬퍼하면서 단단하게!

내 의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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