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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高)'는 사명(社名) 답게 식품 업계에서 독보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었다. 식품 분야에서 독과점 기업이라 불릴만할 정도였다. '고씨네'라는 간판을 달고 밀가루와 설탕을 판매하며 시작된 사업은 시대에 따라 조미료, 라면, 만두, 제과제빵 같은 대중 식품 전반을 다루며 중견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대중을 상대로 하는 기업은 사업 확장에 한계가 있었다. 기업으로서 큰 자금을 굴리기 어려웠다. 고소득은 큰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이 필요했고 때마침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미식업계였다. 그때 당시 미식업계의 타겟층은 돈이 남아도는 부자들이었다. 고소득은 해외에서 오랜 요리 경력이 있던 셰프들을 고용하고, 투자했다. 그는 한식, 중식, 일식, 유럽식 레스토랑을 차렸고 브랜딩화 했다. '고'가 브랜딩 한 레스토랑을 이용하는 고객들은 한 끼 식사에 중산층 월급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미식업계 확장을 위해서 셰프들이 나오는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도록 투자하고 셰프들의 이름이 유명해지면 그들의 이름을 내건 대중 식품을 만들어, 사회 고위층과 중산층 모두를 아우르는 사업을 이루었다.
아들 고사한 역시 아버지를 존경했다. 아버지의 사업이 커지는 것만큼 집이 넓어졌다. 어울리는 사람들의 대화 수준도 아주 교양 있었다. 아버지가 사회적으로 성취를 할 때마다 자신도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고사한이 본격적인 후계 수업을 하면서 두 부자(父子)의 관계는 틀어졌다. 고사한이 야심 차게 추진한 프로젝트는 밀키트였다. 어느 중소기업이 처음 개발한 밀키트를 보고 그는 이 사업이 잘 될 거라고 확신했다. 적극적으로 해당 기업을 인수하고 무지막지한 돈을 쏟아부으며 사람들에게 밀키트의 편리성을 광고했다. 그러나 밀키트는 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대중 식품은 가성비가 중요했는데 그런 점에서 밀키트는 편리하지만 양이 적고 가격대도 외식비와 맞먹었다. 결국 밀키트 사업은 처음을 제외하고 쭈욱 적자만 보다가 사업 철수를 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누구와 일을 하는지 또 누구를 대상으로 일 하는지에 대해 공감대가 없었다. 그 뒤로 몇 번 사업을 진행해 보았지만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통 크게 사업을 하지 못한다며 혀를 끌끌 찼다.
고독주가 기획팀으로 막 들어왔을 때는 전 세계적으로 환경 이슈가 뜨거울 때였다. 고독주는 회사에서 주력하지 않았던 비건 식품 분야를 양지로 끌어올리는 '원 파머, 원 셰프'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천연 비료로 농사짓는 농부들을 직접 섭외한 후 사내 인적 시스템에 등록시키고, 등록된 농부들을 레스토랑과 연결시켜 주는 것이었다. 새로운 레시피 개발로 바쁜 레스토랑들은 원 파머, 원셰프 프로젝트를 환영했고, 기꺼이 컨설팅 비용을 지불했다. 이 프로젝트는 가축 영역으로도 확장해 사료가 아닌 풀을 먹이는 축산업자와 낙농업자들을 섭외하여, 미식분야와 부자들 사이에서 각광을 받았다. 그리고 레스토랑에 납품이 어려운 재료들은 가성비 좋은 대중 식품으로 만들어 팔았다. 로스가 거의 없는 사업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사회적 요구를 실현해 회사의 이미지를 수직으로 상승시킴과 동시에 식품 유통업까지 회사의 사업을 확장시켰다. 유기농 사업은 아직 사업 규모가 크진 않아도 소비층의 충성도와 지지도가 확고하기에 가능한 사업이었다. 이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고독주는 기획팀에서 전략기획본부장으로 한 번에 승진했다.
고독주는 미국과 서유럽 쪽에도 '원 파머, 원 셰프'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었다. '고'의 글로벌 식품 기업 입지가 시작되냐 마느냐 결정되는 중요한 프로젝트다. 동시에 K컬처가 각광받는 시대이니 K푸드 관련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었다. 즉 고독주는 정말 바빴다. 오전 중에 한국어와 영어를 번갈아 쓰며 보고서를 확인하고 피드백하고, 점심시간이 되면 비즈니스 파트너와 식사를 하며 사업 얘기를 하고, 오후가 되면 다시 한국어와 영어, 불어를 번갈아 쓰며 통화와 서류에 파묻혀 일을 해야만 했다.
몇 주 동안 프로젝트 두 개를 동시에 진행하느라 화장실 가는 것까지 참으며 일을 하던 고독주에게 급기야 건강 이상 징후가 발견된다. 부족한 잠을 깨우기 위해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다가 거울을 통해 눈이 새빨개진 걸 본 것이다. 환절기도 아닌데 눈은 알레르기가 일어난 것처럼 실핏줄이 터져있었다. 그동안 구순염도 몇 개씩 생기고, 코피도 좀 흘리긴 했지만, 실핏줄이 터진 눈을 보니 몸을 좀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류는 봐야 하니까. 그렇지만 발걸음은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비서실을 지나가는데 김 비서와 비서실 직원들이 눈에 보였다. 그들도 몰골이 말이 아닌 것 같았다. 고독주는 주머니에 손을 꼽고 잠시 생각을 하다가 직원들에게 말했다.
한 시간만 잠깐 쉽시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밖으로 나갔다. 따라 나오려는 김 비서를 제지하고 고독주는 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회사 로비로 내려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로비를 오갔다. 로비에서 마주친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긴 다리를 쩍쩍 벌리며 걸었다. 아침 시간과는 다른 풍경의 로비를 걸으며 고독주의 시선이 자연스레 1층 카페로 향했다. 오늘 아침에도 들렸다. 벌써 오후 3시이니 영원수는 없을 것이다. 고독주는 자기도 모르게 카페로 들어가 커피를 주문했다. 카페 안은 앉아서 기다릴 곳이 없을 만큼 사람들로 가득했고 직원이 세 명이나 있을 정도로 바빴다.
아침에 혼자 분주히 일하던 영원수가 생각났다. 그녀는 오늘도 무표정한 얼굴로 주문을 받았고 샌드위치를 만들었고 커피를 내렸다. 영원수와의 대화는 항상 자신이 먼저 입을 열어야 시작됐다. 오늘의 대화는 아주 짧았다.
"맛이 매일 똑같아서 좋습니다. 그 덕에 업무 효율도 높아진 것 같습니다."
"잘됐네요."
오늘 아침 대화는 그게 전부였다. 지난주에는 조금 더 길었다. 고독주는 영원수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조금 신경 쓰였다. 1번 고객님. 매일 만나는 사이가 된 데에는 자신의 공이 컸으니, 이제 자신의 이름을 물을 때도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하다 못해 직함으로라도 불러주길 바랐다. 그래서 참다못해 지난주에 영원수에게 물었다. 자신이 본부장인 걸 알고 있냐고. 영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독주는 알고서도 계속 1번 고객이라고 부른 영원수에게 내심 섭섭했지만 뒤이어 이어지는 영원수의 말에 서운함이 조금 누그러졌다.
"..감사합니다."
고독주는 자신이 본부장임을 알면서도 항상 자신을 1번 고객님이라 부르는 영원수의 프로페셔널한 직업 철학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는 그녀를 높게 평가하게 되었다.
커피를 테이크 아웃해 나온 고독주는 인근 산책로로 향했다. 어렸을 때 책을 너무 많이 봐서 주치의에게 초록색을 많이 보고 멀리 보는 습관을 갖는 게 눈 건강에 좋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따뜻한 커피를 들고 30분쯤 걷다가 구두 때문인지 발이 아파왔다. 가까운 벤치에 앉아 고개를 들어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봤다. 어릴 적 대나무 숲에 있을 때처럼 숨을 들이켜고 내쉬며 호흡하며 눈을 감았다. 심장 고동이 느껴진다. 다시 한번 자신이 곤충이 아님을 확인한다. 육체적 체력이 한계에 다다른 자신을 돌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침 식사 시간이 좀 더 길어지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영원수는 뭐라고 답해줄까. 그녀의 대답이 문득 궁금해졌다. 무표정한 얼굴의 영원수를 생각하며 혀 끝에서 무언가 말이 나오려 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고독주는 영원수가 내린 커피 맛과 다름을 느끼곤 아쉬워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 식탁에 모인 고씨 사람들. 고소득은 벌써 두 달이 넘도록 손자와 아침 식사를 먹지 못했다. 고소득은 현미를 꼬드득, 꼬드득 씹으며 불만스레 밥을 먹었지만 첫째 아들 내외는 말없이 식사를 했다. 손자가 없는 것에 고소득의 심기가 불편한 낌새를 눈치챈 가족들도 아무 말 없이 밥만 먹었다. 고우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참을 수 없었는지, 아버지 대신 새언니에게 조카를 나무랐다.
"독주는 아침을 왜 안 먹는 거래?"
"프로젝트 두 개를 동시에 진행하느라 바쁜가 봅니다. 아버님이 이해해 주셔요."
"독주 혼자서 일 하는 것도 아니잖아~"
"마, 시끄럽다. 사내놈이 한창 일 할 나이 인기라."
고소득은 그렇게 말은 했지만 표정엔 아침 식사에 참여하지 않는 손자에 대한 서운함이 뚝뚝 묻어 있었다. 시아버지의 감정을 읽어낸 지영은 고소득이 좋아할 만한 말로 아들을 대변했다.
"직원들이 일한 걸 가져오면, 자기가 한번 더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 같더라고요. 애가 워낙 완벽주의자잖아요, 아버님."
그렇게 말하는 지영이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잘난 아들을 둔 어머니의 마음을 시아버지가 이해 못 할 리 없었다. 시아버지는 회사 창업주답게 회사에 이득이 되는 일이라면 매우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이었다. 고소득이 며느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하는 표정이 되자, 식탁 분위기도 조금 누그러졌다. 고우나가 입을 비죽이며 말했다.
"아, 우리 독주 보고 싶다~"
"동문이 어젯밤에 일본에서 돌아왔다죠?"
가족들이 일제히 수저질을 멈췄다. 고우나는 자기가 항상 새언니에게 먼저 시비 건다고는 인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우나의 마음은 늘 새언니를 향한 적개심과 억울함이 항상 자리했다. 승기를 잡은 새언니 표정에 고우나가 눈을 흘기며 아랫입술을 깨물며 분노를 애써 참았다.
"동문이 왔다꼬?"
"아, 아니.."
"네, 아버님. 김 비서가 저녁에 문 앞에서 마주쳤다던데요."
"근데 와 내한테 인사하러 안 오나!?"
고소득은 손자 동문을 보면 한 마디 할 참이었다. 골프 모임에서 어울리는 영감탱이들도 손자를 걱정하는 척하며 속을 긁기도 했고, 독과점 기업 이미지 때문에 정치계에서도 기업을 주시하며 보고 있었다. 작은 꼬투리도 잡히면 안 됐다. 다른 기업들이 오너 일가 문제로 큰 홍역을 치른 것을 봐와서 잘 알고 있었다. 처음 스캔들 얘기를 들었을 때보다야 분노는 사그라들었지만, 회사 주가에 영향을 끼쳤으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고우나는 고소득이 동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동문보고 아침 식사에 오지 말라고 한 것은 자신이었다. 아들이 가족들 앞에서 면박당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침 식사 시간이 되기 전에 깨워서 얼른 내보낸 것이다. 아버지 말에 딱히 반박을 못하던 고우나는 남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도, 동문이 출근했습니다, 아버님!"
우 서방의 말에 고소득이 의심의 눈초리로 고우나와 사위를 봤다. 지영을 비롯한 다른 가족들은 입을 씰룩였다. 다들 '동명이가?' 라며 믿지 않는 눈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옥명은 시아버지의 화를 돋운 며느리를 나무라며 딸을 구원해 주었다.
"동문이 걔, 독주 사촌이다. 동문이 얼굴 상한 건 안 보였니?"
지영은 표정 없이 시어머니를 바라봤다. 고우나가 크흠, 하며 어깨를 조금 폈다. 옥명은 남편에게 동문이를 감싸며 말했다.
"이번 일로 반성했을 거예요. 일에만 전념하려고 출근했겠죠. 애 좀 믿어봐요."
옥명의 말에 고소득이 헛기침을 하며, 다시 밥을 먹었다. 가족들도 씰룩이던 것을 멈추고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 * *
오늘 고독주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출근했다. 김 비서에게는 제시간에 출근하라고 연락했고 직접 차를 운전해 회사로 갔다. 침대에 누워도 밤새 뒤척이기만 하다 일어났다. 눈이 여전히 시뻘겋고 몸이 피곤한데도 정신이 각성돼 있는 탓인 걸까. 분명 어제 오후에 마신 커피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고독주는 지하에 주차를 했다. 그렇지만 프로젝트 때문에 일을 안 할 수는 없고, 하루 중 유일하게 평안한 시간을 놓치고 싶진 않았다. 고독주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올라와 카페로 향했다. 영원수 홀로 오픈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거운 우유 박스를 낑낑대며 옮기고 새로 들어온 토마토에 이상이 없는지 살펴보고 있었다. 주방 일이 끝났는지 영원수가 몸을 돌아 포스 기를 켜기 위해 뒤로 돌자, 문 앞에 서서 영원수를 지켜보고 있던 고독주가 움찔 놀란다. 그 덕에 영원수의 시선을 끌었고 둘은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고독주의 심장이 쫄깃해졌다. 자신이 너무 일찍 와서 민폐를 끼친 건 아닐까. 고독주를 발견한 영원수는 주방에서 나와 로비 쪽 문으로 다가왔다. 영원수가 자신에게 점점 다가오자, 고독주는 자신의 심장도 점점 조임을 느꼈다. 숨도 조금 거칠어졌다. 영원수가 무표정한 얼굴로 정문 문을 열었다. 딸랑, 하고 종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서 기다리세요."
고독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카페로 들어섰다. 고독주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녀에게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서 영원수가 다시 주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문 앞에서 서성이다가 평소 앉던 자리로 가서 앉았다. 정작 영원수는 고독주를 들이고 나서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스스로에게 의문을 갖고 있었다. 평소대로라면 7시가 될 때까지 절대 문을 열지 않았을 텐데 고독주에게만은 저도 모르게 문을 열어준 것이다. 영원수는 문밖에 서서 기다리는 고독주를 보고선 그를 향해 바로 몸을 움직인 자신에게 위화감을 느꼈다.
7시가 되자, 고독주가 계산대로 향했다. 평소대로 같은 메뉴를 시켰다. 고독주는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영원수는 오늘따라 더 빨리 샌드위치 재료를 꺼낸다. 혹시 자신이 너무 일찍 와서 불만이었던 걸까? 카드를 받아 든 손끝이 조금 저릿함을 느끼며 자리로 돌아갈 때였다. 평소대로라면 들리지 않을 종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음성과 함께.
"여, 사촌~"
자신과 동갑인 사촌형제, 우동문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