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고독 6 "떡볶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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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헵시바

퇴근 무렵 영원수의 폰에 문자 알림이 떴다. 문자를 확인한 영원수는 고개를 들어 로비 쪽을 바라봤다. 회전문 앞에서 고독주가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했다. 아침에 사무실로 올라가기 전 고독주는 급한 일이 생기면 연락하자며 영원수와 연락처를 교환했다. 잠시 후 영원수는 아침에 출근하며 입었던 복장 그대로 갈아입고 나왔다. 사장에게 인사를 하고 검은색 크로스백을 꽉 쥐며 회전문 앞에 서있는 고독주를 직시하며 다가갔다. 로비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고독주에게 인사하며 영원수를 흘깃 바라봤다. 고독주는 이러한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그가 영원수에게 먹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었고, 영원수는 생각해 둔 게 있다는 듯 앞장서서 걸어갔다.

회운구의 중심 상권을 살짝 벗어나면 보안업체를 낀 저택들이 즐비한 오르막 길이 나오는데, 길 초입에는 으리으리하게 지어진 사립 초등학교가 있었다. 학교 앞에는 주변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허름한 가게가 있었다. 영원수가 고독주를 이끌고 들어간 곳은 바로 30년째 맛집으로 명맥을 이어온 떡볶이 가게였다. 생각지도 못한 점심 식사에 고독주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마주 앉은 영원수가 컵에 물을 따르는 모습을 지켜보며, 테이블 아래 서로의 무릎이 닿을까 의자를 뒤로 쭈욱 뺐다. 영원수가 고독주에게 물컵을 건넸다.


"금요일 오후는 떡볶이를 먹는 날이라서요."

"다른 메뉴 드셔도 됐는데요."

"싫어하시나요?"


고독주는 고개를 저었다. 영양적으로 최악의 식품이기에 먹지 않았을 뿐이다. 영원수는 동호회를 하는 날에는 꼭 떡볶이를 먹었다.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 날에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며 하루를 만끽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원수는 평소 비싸서 시키지 못했던 삶을 달걀을 시켜도 되냐고 물었다. 고독주는 분식집 사장에게 삶은 달걀도 2개 추가해 달라고 말했다. 그가 호기롭게 주문을 끝내고 영원수를 보았다. 고독주가 보기에 영원수는 매우 만족한 것 같았다. 표정을 통해 감정을 읽기는 힘들었지만, 꽤 여러 번 대화를 나누다 보니 무표정 속에서도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자신을 빤히 보는 고독주의 시선이 느껴져 영원수가 침묵을 깼다.


"그래서 뭘 물어보신다고요?"


정신을 번뜩 차린 고독주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영원수 씨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습니다."


고독주는 자신이 생각했던 좋은 사람이 어떤 상(想)이었는지 언급하면서, 오래도록 품어온 짐을 한 꺼풀, 한 꺼풀 풀어내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갈등, 상속을 못 받을까 할아버지 비위에 맞추는 집안사람들, 후계자 자리를 지키기 위해 늘 불안해하는 어머니, 이 모든 중심에 자신이 있다는 부담감, 친척들 아버지의 열등감을 견뎌야 했던 복잡한 심정, 사마귀를 만난 이야기까지 고독주는 빨간 떡볶이를 보며 한참 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영원수는 그가 얘기하는 동안 겨우 떡 하나와 계란 반 개를 집어 먹었다. 떡볶이를 맛있게 먹으며 들을 수도 있었지만, 진솔하고 진중한 이야기를 그에게 성의 없는 인상으로 비치고 싶지 않았다. 논리 정연하게 말을 끝낸 고독주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제가 말이 너무 많았네요."


영원수는 그의 눈동자를 보며, 그가 지금 외롭고 슬프다고 느껴졌다. 고독주는 영원수의 감정을 알리 없었다. 그는 자신이 너무 많은 것을 털어놓은 게 아닌지 불안했다. 그녀가 어떻게 반응할지 조금 염려가 됐다. 영원수는 포크를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억지로 희생한다면 남들에겐 좋은 사람으로 보일지 몰라도, 스스로에겐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쪽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게 가능합니까? 남들에게만 좋으면 스스로의 감정을 헤치는 일이니 나쁜 사람이 되고, 스스로를 챙기기 시작하면 이기주의자가 될 것 같습니다."


영원수는 그의 이타심이 조금 답답했다. 하지만 영원수는 진심으로 그가 자유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는 본부장님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독주는 영원수의 말을 조금도 놓치고 싶지 않아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귀를 기울였다.


"제가 매일 일하기 바랐던 본부장님의 마음은 본부장님 스스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유익을 위한 것이니 이기심이라고 할 수 있죠. 본부장님의 이기심은 제가 매일 카페에 나와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게 했습니다. 그 덕에 저는,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본부장님이 희생하지 않고 우리 서로에게 모두 좋은 일이 되었습니다. 이 일로 저는 본부장님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요."


영원수는 조금 더 말을 이어갔다.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돼야 한다는 프레임에 자신을 가두지 마시면 좋겠어요. 상대가 없으면 나란 존재가 없는 게 아니니까요."

"사회생활은 참으면서 살아야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당히 수용하면서 살죠. 서로가 완전히 좋은 사람도, 완전히 나쁜 사람도 아닌 걸 아니까요."


영원수는 감정 기복이 심했던 오빠와 우울하지만 늘 따뜻한 새 밥을 먹이려 했던 할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또 나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완전히 미워할 수 없는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서도 말했다. 자랑할 만한 가족 얘기는 못되었지만, 진중한 고민을 친하지도 않은 자신에게 털어놓은 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러다 또 누군가가 생각난 듯 영원수의 눈이 번뜩였다.


"아, 사촌 분도 좋은 면, 나쁜 면이 있잖아요."

"..네?"


고독주는 영원수의 입에서 동문의 이름이 나오자 저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무례한 사람인데 텀블러를 쓰잖아요."


영원수의 입에서 뜻밖의 인물이 언급되면서 고독주는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에게는 무례하면서도 환경을 생각할 줄 아는 사촌을 생각하며. 고독주는 평소보다 따뜻한 표정으로 영원수에게 말했다.


"..영원수 씨도 제게 좋은 사람입니다."


영원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듣다가, 포크로 계란을 찍었다. 고독주도 오랜만에 떡볶이를 집어 들었다.


* * *


정규 퇴근 시간 한 시간을 앞두고 고독주는 회사로 돌아왔다. 11층을 누르려다가 9층을 누른다. 마케팅 팀으로 들어서자 다들 일어서며 인사했다. 동문만이 슬쩍 보다가 다시 모니터로 집중했다. 동문은 고독주에게 화가 난 상태였다. 새벽부터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잠자고 있던 동문을 깨우고 할아버지 방에 던져 놓고 갔기 때문이다. 고독주는 감정이 훤히 보이는 사촌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우 팀장, 부탁이 있습니다."


고독주는 공적인 자리에서는 동문에게 꼭 존대를 썼다. 그러나 동문은 아랑곳 않고 편하게 대했다. 몇 번 주의를 줬지만 그때마다 더 친근한 척 말을 걸었다. 동문은 모니터를 보며 일하는 척 마우스를 부술 듯이 클릭하다가 멈췄다.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비죽이며 말했다.


"나한테?"

"안 쓰는 텀블러 있으면 하나 줄 수 있습니까."


동문은 독주에게서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와 그를 올려다보았다. 고독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 말했다.

"저도 환경을 생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없습니까?"


동문은 고독주의 말에 아침에 서운한 게 싹 가가실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달라진 기분에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하며 어깨를 피고는 서랍에 있는 텀블러를 하나 둘 꺼내기 시작했다.


"크흠흠, 골라 보든가."


고독주는 걔 중에 무채색 정장에 튀지 않을 검은색 텀블러를 살펴보며 말했다.


"유기농 식품은 홍보 과정도 친환경으로 해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우 팀장이 추진하면 잘할 것 같습니다?"

고독주는 그렇게 아이디어를 던져놓고 사촌에게서 등을 돌려 다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동문은 사무실을 나가는 고독주의 등을 보며 소리쳤다.


"두고 봐! 내가 얼마나 일 잘하는지 보여줄 테니까!"


* * *


영원수와 고독주는 함께 떡볶이를 먹은 후 서로에게 조금 더 표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고독주도 영원수도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자기의 이야기를 해보게 된 것이다. 영원수는 인생 처음으로 자신을 좀 더 드러낼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에 조금 기뻤다. 그러나 침착하려 감정을 억눌렀다.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 그와 자신은 손님과 직원이니까.

고독주는 영원수를 더 알고 싶었다. 10대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친구는 없는지. 또 연인은 없었는지 등. 참을성을 잃은 고독주는 영원수에게 말을 걸었다.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됐다고 했는데 혹시 뭔지 물어봐도 됩니까?"


영원수는 조금 쑥스러운 듯 어물거렸다. 고독주는 그래도 들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영원수가 잘 되길 바랐다.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돕고 싶었다.


"..그림을 더 잘 그리고 싶어요. 학원에 다니고 있거든요."


고독주는 영원수의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하다가 쟁반을 가져다주며 말했다.


"제가 대신해 줄 수는 없는 거네요."

"많이 그리면 빨리 는다고 하니까 열심히 그려봐야죠. 지금은 알바 때문에 시간내기가 어렵지만요. 이런 얘기, 누군가에게 처음 말해 봐요."


영원수가 쑥스러운 듯 말했다. 고독주는 영원수의 일을 해결해 주고 싶었다. 그림 실력을 대신 높여줄 수도 없었다. 신이 아니고서야. 고독주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턱을 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원수는 이 장면을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지만 쟁반의 접시와 컵을 정리했다. 고독주는 수고하라 인사하고 사무실로 올라갔다.


* * *


몇 주가 흘러 달력 한 장이 다시 넘어갔다. 한 겨울 크리스마스 시즌이 시작되었다. 카페 분위기가 지난달과는 확연히 연말스러워졌다. 사장이 출근하면서 창고로 영원수를 불렀다.


"영원수 씨, 혹시 연말까지만 근무할 수 있을까?"


충격적인 통보에 영원수는 온몸이 얼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아니오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고용주는 근로자에게 30일 전에 통보하면 되니까 법적 하자가 없었다. 아니 왜? 누군가 자신의 무표정한 얼굴 때문에 컴플레인을 건 것일까? 혹시 고독주의 사촌인 걸까? 아니면 다른 사람인 걸까? 사장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다.


".. 혹시 본부장 하고 무슨 일 있었어?"


영원수는 옷을 갈아입으면서 손이 덜덜 떨려서 제대로 입을 수 없었다. 단추도 잠그는 데 손이 떨렸다.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좀 전에 사장의 말을 듣고서부터다.

본부장이 영원수 씨를 매일 안 봐도 될 것 같대.

사장은 세입자 입장에서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둘러댔다. 영원수는 사장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림 그리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했더니 시간을 만들어주려고 나를 해고시키라고 사장에게 압력을 한 걸까? 이만한 알바를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이건 고용 비리, 아니 고용 갑질 아닌가? 영원수는 그를 고소해야 하나 생각했다. 머릿속에서는 도저히 그를 좋게 생각해보려 해도 그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가슴에서 울컥 쓰라림 같은 것이 올라왔다. 영원수는 그에게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사무실이 몇 층인지 알아내려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에게 연락했다. 자신의 속도 모르고 그가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영원수 씨를 보러 갈 참이...]


눈앞에 엘리베이터에서 고독주와 김 비서가 있었다. 영원수는 커다래진 눈으로 그를 보았다. 고독주는 자신을 보고 반가워했지만 그의 반가움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영원수는 다짜고짜 엘리베이터를 타고 닫기 버튼을 눌렀다. 영원수는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 손 그대로 고독주의 뺨을 톡, 하고 때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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