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버전
고독주의 눈빛은 평소의 냉정함 대신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까만 머리칼도 한쪽으로 흐트러진 채 멈춰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세 사람이 모두 말없이 숨도 동작도 멈추고 무거운 공기를 자아냈다. 김 비서는 마치 밀실공포증이 있는 사람이 밀실에 갇힌 사람처럼 안구와 콧구멍, 폐가 확장됐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영원수 역시 차분하고 무심하던 표정에서 미묘한 균열을 느낀 얼굴로 멈춰 있었다. 오른손을 고독주 얼굴 근처에서 든 채.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역시 김 비서였다. 그는 다급하게 본부장실이 있는 11층 버튼을 눌렀다.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올라갔다. 도착 전까지 세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고독주는 고개를 돌려 영원수를 내려다봤다. 그는 그녀가 왜 자신을 이런 눈으로 보는지, 자신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진상 파악이 되지 않았다. 미세하게 떨렸던 영원수의 손의 느낌이 왼쪽 뺨 부근에서 여전히 느껴졌다. 영원수는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꽉 붙잡고 고독주를 보며 말했다.
"당신이 날 해고하라고 사장에게 말했나요?"
영원수의 말을 들은 고독주는 그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고독주는 김 비서를 한 번 쳐다봤다. 김 비서는 울상을 지으며 고독주의 손에 들려있는 까만 결재서류철을 가리켰다.
"영원수 씨는 잘렸다고 생각할 겁니다."
김 비서의 말을 들은 영원수는 김 비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잘렸다고 생각할 거라고? 이미 잘렸는데? 그렇게 생각할 때쯤, 띵- 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김 비서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뒤이어 영원수와 고독주가 복도를 걸었다. 본부장실로 향하는 복도에는 구두 굽 소리만 또렷이 울렸다. 전략기획본부실 문이 열리자 안에 있던 직원들이 일제히 일을 하다 멈추고 몸을 일으켜 인사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고독주 뒤로 따라오는 낯선 여성을 보고는 어정쩡한 자세로 멈춰 섰다. 사무실 직원들은 호기심과 당혹스러운 눈짓을 서로 교환했다. 본부장실 문을 열리자 그 사이로 고독주가 익숙하듯 김 비서 옆을 바람처럼 지나갔다. 김 비서가 영원수에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고 문을 닫았다. 고독주는 무표정한 얼굴로 영원수를 소파로 안내했다. 두 사람은 투명하다 못해 베일 것 같은 유리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을 보고 김 비서는 본부장실 문을 닫았다.
사건의 진상은 이랬다. 고독주는 영원수 같은 훌륭한 인재를 자신의 아침 식사를 만들게 할 전문 인력으로 스카우트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사 내규에 맞게 전략기획본부 정원 증원 절차가 필요했다. 본부장의 업무 효율 향상을 위한 전문 인력을 채용하는 특수한 상황인 만큼 법적으로 문제가 없도록 검토해야 했다. 고독주는 이 일을 최우선적으로 추진했다. 그래야 영원수가 그림 그릴 시간이 늘어날 테니 말이다. 인사부와 계약직 증원 절차 조율을 마무리하고, 그는 영원수가 만족할 만한 조건으로 고용계약서를 준비했다.
김 비서는 고독주의 지시를 받으면서도 찜찜했다. 자신의 상사는 소통친화적인 사람이 아니었고, 일에 있어서 불필요한 것을 최대한 제거하며 업무를 진행하는 편이었다. 김 비서는 그녀에게 미리 언질을 하는 게 좋지 않냐고 조언해 보았지만, 고독주는 매우 훌륭한 인재를 카페 사장이 놓아주지 않을 거라고 답했다. 김 비서는 자신의 상사의 말을 듣고 그가 점점 팔불출이 되어가는 것 같다고 여겼다. 아마도 고독주의 이런 의도를 모른 채 카페에서 잘린다면, 영원수는 분명 고독주를 오해할 것이었다. 그래서 김 비서는 카페 사장으로부터 영원수의 해고 소식을 연락받고, 바로 고독주를 데리고 영원수를 찾아가려 한 것이었다. 계약서를 보여주고 설명을 하면 바로 이해해 줄 거라고 여기며.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김 비서가 영원수는 행동파라는 걸 알지 못했기 내린 것이었다.
유리 테이블 위에는 검은색 서류철이 펼쳐져 있었다. 그 위로 고용계약서라 적힌 종이 한 장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영원수는 계약서를 빤히 보며 고독주에게서 일의 진상을 전해 들으며 점점 눈에 초점을 잃어갔다. 마침내 고독주의 말이 마쳐지자, 영원수는 펼쳐진 서류철을 두 손으로 들고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 차마 고독주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너무 창피해서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가 자신에게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알면서, 순간의 감정으로 그를 때린 자신의 오른손이 미웠다. 하지만 자신은 전후 사정을 전혀 모르지 않았는가! 영원수는 서류철을 얼굴에서 슬쩍 내리며 고독주를 보았다.
"본사 규정 상 4시간 미만 근무는 계약직으로 고용해야 한다더군요. 그래서 영원수 씨를 프리랜서로 고용하려고 합니다."
"왜 저에게 계약에 관해서 말씀 안하셨죠?"
"그건.."
고독주는 카페의 전문 인력을 빼오는 데, 카페 사장에게 굳이 그 의도를 밝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경쟁 기업의 인재를 스카우트하면서 당신 회사 사람을 데려가겠다고 사전에 알리는 헤드헌터는 없으니까. 고독주가 기업을 상대로 하는 모든 비즈니스에서는 서로 모든 패를 보이지 않는 게 원칙이었다. 더구나 보증금 동결 건으로 인해, 이미 고독주는 카페 사장과의 관계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본론만 전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지난 번 일도 영원수가 고맙다고 말했으니 이번 일도 그렇게 생각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고독주는 영원수가 기뻐할 거라 기대하면서도 동시에 자신만의 전문 인력이 된다는 생각에 너무 기쁜 나머지 한 가지를 간과하고 말았다. 바로 이 문제를 사업가 마인드로 접근했던 것이다.
엘리베이터에서만큼은 아니지만 서운해 보이는 표정의 영원수를 보며 고독주는 입술을 뗐다 붙였다 반복했다. 그리고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미안..합니다. 마음이 급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고독주를 보며 영원수는 어쩐지 서운함이고 용서고 뭐고 할 마음이 사라졌다.
영원수의 고용 계약 조건은 이러했다. 오전 6시 40분까지 출근해서 전략기획본부의 조명을 켜고 블라인드를 걷은 후, 7시 10분까지 본부장과 김비서 그리고 영원수의 샌드위치와 커피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본부장실에서 30분 동안 고독주와 함께 식사하는 게 영원수의 업무 내용이었다. 근무시간은 총 1시간이었지만 고독주가 영원수의 실력을 높이사 매우 높은 시급을 책정해 주었다. 월급으로 따지면 카페에서 받는 월급보다 많았다.
고독주는 영원수가 서류를 보고 있는 줄 알고 그녀를 설득하려 계약 내용에 대해서 쉬지 않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 영원수는 계약 내용을 보고 있지 않았다. 서류철은 고독주의 얼굴을 가리는 용도가 된 지 오래였다. 영원수가 한참 동안 말이 없어 고독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계약 조건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니요. 근데.."
"네, 말씀하십시오."
"왜 같이 식사를 해야 하나요?"
"영원수 씨는 업무 중이어서 몰랐겠지만 저는 영원수 씨가 있어서 혼자서 샌드위치를 먹으면서도 외롭지 않았습니다. 그 기분을 계속 이어가고 싶습니다."
영원수는 슬쩍 서류철을 내려 고독주의 얼굴을 살폈다.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도대체 자신을 왜 이렇게 도와주려고 하는 걸까. 고독주의 행동과 행동을 빚어낸 그의 마음에 영원수는 혼란스러웠다. 영원수의 답을 들은 고독주는 양복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그럼 사인할까요?"
영원수가 조심스레 서류철을 내려놓고 만년필을 건네받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