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버전
영원수는 '고 본사' 정류장 앞에 서있다. 평일 아침 매일 내렸던 장소였다. 오늘만큼은 이 정류장 이름이 유독 눈에 띄었다. 같은 건물로 출근하지만 장소가 달라진 영원수의 출근길. 그동안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새 직장이라고 이렇게까지 긴장된 적은 없었다. 영원수는 자신의 낯선 감정을 인식하며 빌딩 안으로 들어섰다. 로비에 들어서자 'SECURITY'라는 큰 글자가 크게 프린팅 된 조끼를 입고 있는 보안팀 직원 둘이 보였다. 김 비서에게 받은 사원증을 출입 기기에 가져다 대자 '삑'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천장에 달린 센서등이 환하게 켜졌다. 영원수가 전략기획본부실로 가까이 갈 때마다 센서등이 복도를 밝혔다. 잠겨진 본부실 유리문. 문 안쪽은 조명 하나 켜져있지 않아 캄캄했다. 영원수는 지문 인식기에 지문을 찍었다. 덜컹, 하고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캄캄한 본부실 안에 들어선 영원수는 스마트폰을 켰다. 김 비서가 보낸 아침 지침서 파일을 보고는 본부실 출입문 왼쪽에 위치한 스위치를 눌렀다. 불투명했던 유리 창문이 투명해지면서 새벽의 푸른 하늘이 짠 하고 드러났다. 또 다른 스위치를 켜자 조명이 은은하게 켜지며 공간이 밝아졌다. 지난번 고독주와 김 비서를 따라왔을 때는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는지만 이번에는 전략기획본부실이 한눈에 보였다. 높은 천장과 목재 데스크, 멀리 한강이 내다보이는 풍경과 공기 중엔 은근한 향까지. 영원수가 일해 본 곳 중에 가장 업무 환경이 좋은 것 같았다.
탕비실 안 쪽에는 카페에서 사용했던 것과 같은 미니 오븐이 새 제품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또 냉장고에는 김 비서가 미리 사다 둔 샌드위치 재료들이 들어 있었다. 영원수가 직접 온라인으로 알아봐 추천한 것들이었다. 최대한 고독주가 먹었던 카페 샌드위치 맛을 재현하고 싶었다. 에스프레소 기계는 예산 문제로 준비되지 못했다고 들었다. 다행히 영원수는 카페에서 어깨 너머로 핸드드립을 배워본 적이 있었다. 원두가 담긴 봉투에는 브라질 COE 어쩌고라고 적혀 있었다. 봉투를 여니 고소한 견과류 냄새가 어우러진 커피 향이 났다. 다년간 카페 알바를 다양한 곳에서 해보았지만 이제껏 맡아본 적 없는 고급 원두였다. 영원수는 원두가 아까워서라도 핸드드립 실력을 길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영원수가 오븐에 바게트를 넣고 속재료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복도 쪽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영원수는 뒤돌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고독주와 김 비서였다. 잠시 후 등뒤에서 들려오는 고독주의 인사를 듣고 영원수가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은 아무 말하지 않았다. 영원수의 출근을 확인한 상사 고독주는 본부장실로 들어갔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영원수는 도마 위에 놓인 빨간색 토마토를 다시 썰기 시작했다.
7시 10분이 되자 영원수가 본부장실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고독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고독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방 한쪽에는 작은 세면대가 있었는데, 손을 씻거나 양치를 하는 용도인 듯했다. 고독주는 타올로 물기 묻은 손을 닦고 영원수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영원수가 들고 있던 샌드위치와 커피가 두 개씩 담긴 나무 트레이를 한 손으로 받아 들고, 그녀를 소파로 안내했다.
"여기서 먹죠."
영원수는 끄덕이며, 유리 테이블 위에 샌드위치와 커피를 내려놓았다. 지난 방문 때 고독주와 영원수의 고용계약서가 놓여 있던 그 테이블이었다. 다시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이번에는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이에 두고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고독주는 허벅지를 두어 번 쓸더니 입을 열었다.
"머, 먹을까요?"
두 사람은 매일 아침, 식사를 같이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처음 며칠간은 대화의 흐름이 어색하고 긴장한 탓에 영원수와 고독주 모두 먹은 게 소화가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30분의 식사 시간은 두 사람 모두에게 결코 느리지 않았다. 아무 대화가 없어도 3분처럼 느껴지는 날이 많았다. 그리고 몇 주가 지나가자 식사시간은 두 사람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그와 어느 정도 친밀해지자, 영원수는 그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용기를 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학원에서 실력이 많이 늘었대요."
"영원수 씨를 고용한 보람이 크군요."
영원수는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독주는 영원수가 자신 앞에서 이전보다 더 풍부한 표정을 짓는다고 느껴 기분이 좋았다. 그녀가 자신을 편하게 느끼는 것 같아서, 의지할만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저는 언제쯤 영원수 씨 그림을 볼 수 있을까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영원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독주는 영원수의 반응에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고독주는 재빨리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영원수는 입술을 오므리고 손을 꼼지락거렸다.
"자신이 없어서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학원이나 동호회 사람들한테는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건, 피드백을 받아야 하니까요.."
고독주는 영원수의 난감한 표정을 보고 아쉬운 듯 말했다.
"괜찮습니다. 억지로 볼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샌드위치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영원수는 자신의 그림에 관심을 가지는 고독주의 눈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해 가슴이 답답하고 또 실망 할까 봐 불안한 마음이 들어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한동안 아침 식사 시간이 평온했는데, 오늘 대화로 다시금 긴장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영원수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릴까 봐 벌떡 소파에서 일어섰다.
"가, 가볼게요!"
"아직 5분 남았습니다."
고독주가 자신의 사무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말했다. 시간을 확인한 영원수는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두 주먹을 꽈악 쥐었다.
"남은 시간 동안 제대로 근무해주세요."
고독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 있는 영원수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그녀를 다시 소파에 앉히며 그 옆에 자신도 앉았다. 고독주는 자신의 허벅지에 그녀의 무릎이 닿자 속으로 화들짝 놀랐다. 사실 별 생각 없이 그녀를 사무실에 더 있게 하려고 붙잡은 것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어쩌다 보니 그녀의 옆에 앉게 된 것이었다! 고독주는 뱃속에서 열이 끓어오름을 느꼈다. 분명 회사에서 난방을 세게 튼 탓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두 사람은 한 마디도 없이 5분을 흘려보냈다.
* * *
본부장실 비서팀의 양 비서는 30대 중반에 벌써 아들만 셋인 장기 근로자였다. 그녀는 총무부 사원으로 입사해 운영팀에서 대리를 달고, 비서팀에서 과장 직급을 달기까지 '고'에서만 벌써 11년째 근무 중이었다. 남들보다 특출 나게 일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주어진 일을 제 살림 챙기듯 야무지게 해냈다. 아들 셋 엄마답게 사소한 일에 옹졸하게 반응하지 않았고, 웬만한 일은 털털한 성격으로 헤쳐 나갔다. 그러나 성격만 털털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입도 털털했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수다를 떨었다. 아침 출근길엔 엘리베이터 안에 사람이 많든 적든, 점심시간엔 화장실에서 양치를 하면서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사내 방송팀에 더 적성이 맞을 거라고 말하곤 했다. 사실 양 비서에게는 수다를 떨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양 비서는 호기심이 많았고 또 호기심으로 얻은 정보를 자랑하길 좋아했다. 그렇게 했을 때 동료들 사이에서는 우쭐할 수 있었고, 상사에게는 예쁨 받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바람과 달리, 사람들은 그저 그녀가 수다스러운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아무튼 그녀는 어딘가에서 들은 정보를 꼭 남에게 말해야 직성이 풀렸다. 내가 아는 정보를 너희에게 전하마. 이것이 그녀의 수다 신념이었다.
양 비서는 평소보다 30분 일찍 출근했다. 막내 아들의 수족구를 앓는 바람에 긴 연차를 써서 간호해야 했고, 그 탓에 업무가 많이 밀려있었다. 그녀는 육아에서 해방됐다는 기쁨으로 사무실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김 비서에게 밝게 인사했다. 양 비서의 목소리를 듣고 김 비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얼굴에는 샌드위치 빵가루가 묻어있었다. 양 비서가 속으로 건수 잡았다고 한쪽 입꼬리를 올리려던 그때, 김 비서가 자기도 모르게 본부장실을 살폈다. 그 바람에 양 비서의 시선도 김 비서를 따라갔다. 블라인드가 거둬진 본부장실 안쪽이 훤히 보였다. 그 순간, 양 비서의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고독주가 아침 식사를 위해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했다는 소식은, 양 비서가 출근한 지 한 시간 만에 본사 직원 전체에게 퍼졌다. 게다가 그 알바생이 '여자'라는 점, 본부장 실에서 고독주와 '겸상'까지 한다는 내용까지 덧붙여졌다. 결국 이 이야기는 해가 중천에 뜨기도 전에 '고소각'까지 흘러갔다.
고독주와 영원수의 이야기가 전달되는 시간은 마침 고씨 집안 여자들이 오전 티 타임 중이었다. 지영은 시집온 뒤 처음으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오늘따라 유독 진한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그만 커피를 하얀 실크 스커트 위에 그만 쏟고 말았다. 지영은 뜨거운 커피로 허벅지가 데인 것도 느끼지 못할 만큼 감정이 요동쳤다. 그녀의 머릿속은 회사로부터 들려온 아들의 소식이 머릿속을 강타한 것이었다. 뇌에서는 이미 과잉 반응 센서가 작동 중이었다.
"도, 도, 도 비서.."
"네, 사모님!"
옥명과 고우나, 그리고 친척들이 놀란 눈으로 지영을 바라봤다. 평소 볼 수 없는 맏며느리의 모습에, 진귀한 구경을 하는 것처럼 모두 숨을 죽였다. 지영은 손을 떨며 도 비서에게 스마트폰을 건네받았다. 연락처 목록을 스크롤하곤 김 비서의 이름을 확인하곤 그 이름을 꾸욱 눌렀다. 신호음이 가는 동안 지영은 가늘고 하얀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숨을 골랐다. 그 바람에 핑크색 립글로스는 금방 말라 버렸다. 신호음 대신 김 비서의 목소리가 들리자 지영은 갈라질 듯한 목소리를 다듬곤 입을 열었다.
"회사에서 본부장님에 대해 이야기가 들리던데, 김 비서님이 정확하게 아실 것 같아서 연락드렸습니다."
지영은 김 비서의 상사는 아니지만, 엄밀히는 계열사 이사였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항상 존댓말을 썼다. 그가 후계자인 아들을 가까이서 보필하는 유능한 인재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지영은 단 한 번도 김 비서에게 고독주의 사생활에 대해 묻지 않았다. 오직 고독주에게만 충성하기 바랐기 때문이다. 충성스러운 직원이 아들 옆에 있는 것, 그것이 지영이 바라는 일이었다. 이렇듯 지영이 김 비서를 존중하고 있었기에 집안사람들은 김 비서를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김 비서도 지영의 배려를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지영이 연락이 오기 전부터 이미 자신의 사내 메신저는 새 메시지로 수 백 통이었다. 심지어 사장님에게도 연락이 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 비서는 직원들이 본부장의 사생활, 즉 가십에 열을 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영의 전화가 걸려오자 그때서야 이 일을 다른 사람들은 엄청나게 큰 일로 받아들였음을 실감했다.
"네, 본부장님께서 아침 식사를 위해 계약직 직원을 고용하긴 하셨습니다."
지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굶으면서 일할 수야 없지,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직원과 겸상한다는 얘기가 있던데, 같이 식사하는 건 김 비서님이신 거죠?"
지영의 물음에 집안 여자들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모두 전화기 너머 김 비서의 말을 듣고 싶어 했지만, 애석하게도 스피커폰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영의 반응으로만 상황을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지영이 이전보다 더 강하게 눈을 질끈 감았다. 집안 여자들의 눈이 요리조리 서로를 살폈다. 그녀들의 입꼬리가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지영이 전화를 끊고 도 비서에게 스마트폰을 넘겼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고우나가 참다못하고 새 언니를 불러 세웠다.
"여자 애랑 먹는데요?"
지영이 고우나를 등지고 멈춰 섰다. 등 뒤로 식은 피가 내려가는 것 같았다. 손끝에는 피가 돌지 않아서 저릿했다. 지영은 대꾸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 * *
영원수에 대한 고소각의 반응은 빠르고 신속했다. 그동안 고독주는 후계자로서의 행보만 보여왔고, 사생활에 여자라곤 티클만큼의 흔적도 없었다. 그런데 고작 한 시간의 아침 식사를 위해, 직원을 그것도 여직원을 채용하고 30분은 겸상까지 한다고? 그동안 고독주를 지켜본 고씨 집안사람들에게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답은 하나뿐이었다.
고독주의 여자.
회사 일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 가족의 사생활엔 별 관심이 없던 고소득도, 손자의 여자 얘기가 들리자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그는 김 비서에게 바로 전화를 걸어 영원수 이력서를 보내라고 말했다. 김 비서는 회장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고, 고독주에게 이를 알렸다. 고독주는 한숨을 쉬며 컨펌했다. 고소득은 태블릿으로 영원수의 이력서 파일을 보기 위해 돋보기안경을 썼다. 그러다 돋보기 도수가 맞지 않나 싶어 안경을 다시 고쳐 쓰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몇 번을 고쳐 써도 자신이 글자를 잘못 본 것이 아니라, 이력서의 내용이 아주, 매우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태블릿을 던져 버렸다.
영원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퇴치돼야 할 벼룩이나 벌레, 바이러스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