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버전
고소득의 불 같은 호출로 고독주와 김 비서는 하던 일을 멈추고 고소각으로 향했다. 응접실에는 고씨 집안사람들이 총출동해 있었다.
김 비서는 고독주 자리에서 뒤로 두 걸음 정도 떨어져서,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사타구니 앞으로 공손히 모으고 서 있었다. 가끔씩 상사의 안색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들어 흘끗 살펴보았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고독주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집 안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김 비서는 자신의 워커홀릭 상사가, 영원수 때문에 감정을 드러내고 별나게 행동하는 걸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양 비서의 말을 빌리자면 딱딱이가 요즘 사람 냄새났다고 해야 할까. 일만 할 때보다 훨씬 친근하게 느껴졌다. 대화 스킬도 더 유해진 것 같았고. 분명 자신의 상사에게 1시간짜리 알바생은 특별한 존재 같았다. 하지만 김 비서가 보기에 당사자들끼리 아직 어떤 관계라 할 것도 없었다. 자신이 보기에 고독주는 자기 마음도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창업주 가족들은 자기들끼리 벌써 난리다. 아직 당사자들은 불도 안 붙었는데 말이다.
고씨 집안사람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돌아가며 고독주에게 한 마디씩 나무랐다. 고졸, 가난한 동네 출신, 아버지 수감, 어머니와 오빠의 가출, 직장도 없이 아르바이트만 수년째. 고독주는 집안사람들이 영원수에 대한 평가를 담담하게 들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떡볶이 가게에서 들은 내용이었다. 가족들처럼 키워드만 놓고 보면 상식적인 가정환경은 아니지만 키워드 사이사이에는 영원수의 상처와 애정이 서려 있었다. 집안사람들은 모르는 것을 고독주는 알고 있었다. 침묵하는 아들을 지영이 잠자코 지켜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해고시켜라."
좀 전까지 흐트러짐 없던 고독주의 눈이 흔들렸다. 어머니는 삼십 년 넘게 키워온 아들의 감정 변화를 단번에 눈치챘다. 평소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아들이었기에 더욱 그의 변화를 눈치채기 쉬웠다. 여자의 직감으로 느꼈다. 계약직 여직원은 아들에게 특별한 사람임을. 어머니를 똑바로 보고 고독주는 입을 열었다.
"제 직원입니다. 해고시킬 권한 없으십니다."
지영이 주먹을 꽉 쥐는 것을 보고, 고소득이 손자에게 턱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해고시켜."
"할아버님!"
고독주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소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려는 손자를 비서들에게 저지시키게 했다. 타협은 없다는 의미였다. 고소득은 뒷짐을 진채 방으로 들어갔다. 지영은 시아버지의 단호한 결단에 만족했다. 고독주의 아버지 고사한은 이제껏 사고 한 번 낸 적 없는 아들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내일부터 아침 먹고 출근해."
* * *
영원수는 다음 날 아침 버스를 탔다. 지난밤 고독주에게서 출근하지 말라는 연락을 받았지만, 그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당분간 아침을 먹지 못할 것 같다고 답했다. 유급 휴가를 줄 테니, 쉬는 동안 그림을 많이 그리라고 조언했다. 갑작스러운 유급 휴가에 기뻐해야 마땅했지만, 그의 목소리가 어딘가 쓸쓸하게 느껴져서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찝찝했다. 원래라면 그의 말대로 출근하지 않아야 했지만 직접 얼굴을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냉장고 샌드위치 재료가 상할 테니 정리한다는 명분으로 회사로 향했다.
로비에 도착한 영원수는 평소처럼 출입 기기 앞에 사원증을 가져다 댔다. 그런데 보안팀 직원이 그녀의 사원증 아래 손을 넣으며 영원수가 출입하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영원수가 직원에게 사원증을 보여 주었지만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동료를 한 번 스윽 보고는 영원수에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올려 보내지 말라는 회장님 지시가 있었습니다."
평소 들을 일 없는 '회장님'이라는 직함에 영원수의 동공이 커졌다. 전 날 회사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무 정보도 없는 영원수는 로비 한가운데서 한참을 서성였다. 그리고는 김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침 일찍 고소각에 와 있던 김 비서는, 가족들에게 붙잡혀 있는 고독주를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영원수의 연락에 놀란 그는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통화 버튼을 누르곤 살면서 가장 작은 소리로 말했다.
[네, 영원수 씨.]
"김 비서님, 제가 지금 탕비실로 올라가야 하는데.. 엘리베이터를 탈 수 없어서요.."
영원수에게서 상황 설명을 들은 김 비서가 놀란 듯 목소리를 높였다.
[출근하셨어요!?]
제 소리에 지레 놀란 김 비서는 황급히 목소리를 낮추곤 다시 말했다.
[본부장님이 출근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네, 그런데 샌드위치 재료를 그대로 두면 상해서요. 그걸 정리하려고 왔는데요."
[제가 할 테니까 얼른 돌아가세요.]
김 비서의 말투에서 영원수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 없는 회장이 자신을 막으라고 내린 지시, 출근하지 말라던 본부장의 말, 그리고 자신을 돌려보내려는 김 비서의 태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본부장님께 무슨 일이 있나요?"
영원수의 물음에 김 비서는 대답할 수 없었다. 고독주가 영원수에게 사실을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김 비서는 말하고 싶어서 입이 아니 온몸이 근질거렸다.
'지금 아주 그냥 쑥대밭이라고요, 영원수 씨.. '
집안사람들에게 붙잡혀 홀로 이 일을 감당하고 있는 고독주가 안쓰러웠던 김 비서는 영원수에게 전부 다 고자질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이 일을 안다고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고독주도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김 비서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영원수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김 비서의 숨소리에 가슴이 조여왔다.
[말 못 해요.]
김 비서의 짧은 한 마디였지만 영원수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봐도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회장이 자신을 올려 보내지 말라는 지시와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정황상 그랬다.
"혹시.. 저와 관련이 있나요?"
긴장하는 마음으로 김 비서에게 묻자 전화기 너머로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영원수는 김 비서의 반응을 깨닫고 알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영원수는 가방 속에 스마트폰을 넣고 뒤를 돌아 보안팀 직원들에게 인사를 했다. 두 직원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영원수는 검은색 크로스백을 꽉 쥐고 회사를 나섰다. 찬 바람이 스산하게 불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겨울 아침, 롱패딩 주머니에 두 손을 꽂아 넣으며 영원수는 버스를 다시 타기 위해 정류정으로 향했다. 번화가 출근길 도로는 시끄러웠지만 영원수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김 비서의 침묵만 울릴 뿐이었다.
* * *
유급 휴가라는 명분으로 전략기획본부실에 출근하지 않은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일주일 전 밤, 김 비서에게 영원수가 출근했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고독주가 영원수에게 연락을 했었다. 영원수는 단도직입적으로 자신 때문에 곤란한 일이 생겼냐고 물었다. 그러나 고독주는 잠시 뜸 들이다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영원수는 표정을 읽을 수 없어서 답답했다.
"거짓말하시는 거라면 실망할 것 같아요."
[...그림 많이 그릴 수 있으니까 좋은 거 아닌가요.]
영원수는 상대를 재촉하거나 상대에게 조르는 일이 없었다.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고독주는 영원수의 학원 생활에 대해 몇 번 묻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급한 일이 있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 뒤로 연락이 없었다. 영원수는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자신과 관련된 일로 고독주가 곤란을 겪고 있는 것 같았다. 찝찝함은 곧 초조함으로 번졌고 영원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엄지와 검지로 아랫입술을 꼬집었다. 깊이 고민할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더 보내고 나서 영원수는 찬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입가에 흐르는 물을 닦으며 물컵을 쾅, 내려놨다.
* * *
고소각에는 고씨 집안사람들을 위해 보필하는 직원이 약 백여 명 있었다. 집사, 메이드, 비서, 정원사, 요리사 등 직무는 다양했다. 물론 최고의 재벌 가문답게 보안팀도 있었다.
보안팀은 두 명씩 짝을 지어, 본가 조, 정원 조, 순찰 조 그리고 대문 조를 돌아가며 근무했다. 본가 조는 본가인 고소전 현관 앞에서 근위병처럼 서서 방문객의 소지품을 확인하는 게 일이었다. 특별한 행사가 없으면 방문객이 없기 때문에 대체로 고씨 집안사람들이 드나들 때마다 인사를 하는 것이 이들의 주요 업무 내용이었다. 정원 조는 고소각 대문에서 본가까지 이어지는 길 중간에서 바리케이드를 여닫는 일을 맡았다. 이들도 대체로 고씨 집안사람들의 차량을 향해 인사하는 것이 주요 업무 내용이었다. 순찰 조는 고소각 안팎으로 돌아다니며 이상한 인물이 없는지 감시했다. 이 조는 그나마 실질적인 경호 업무를 했다. 그중 '꿀조'라 불린 곳은 단연 대문 조였다. 대문 옆에 관제실에 앉아 차량 차단기를 관리하면 됐기 때문이다.
오늘의 대문 조 담당은 백 씨와 장 씨였다. 며칠 전부터 본가에선 후계자 일로 시끄러웠지만, 두 사람에게는 관심 없는 얘기였다. 둘 다 가장이었고, 무사히 퇴직하는 것이 인생 목표였다. 야간 근무로 밤새 근무를 이어온 백 씨가 스마트폰 게임을 하다 지쳤는지 하품을 내뱉으며 기지개를 켰다. 그때 밖에서 끼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동차 바퀴 치고는 작은 소리였다. 백 씨는 관제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대문 앞에 하얗고 녹색 무늬의 자전거 한 대가 멈춰 서 있었다. 따릉이였다.
추운 날씨라 롱패딩 후드를 푹 눌러쓴 인물이 따릉이에서 내렸다. 부피가 꽤 있는 롱패딩이었지만, 인물이 호리호리한 체형인 게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그가 두 팔로 후드를 벗기자, 정전기를 머금은 긴 머리카락이 하늘로 솟았다. 따릉이 운전자는 여자였다. 그녀의 손에는 무늬 없는 갈색 종이 가방이 들려있었다. 조금 묵직해 보였다. 백 씨는 오토바이가 아니니 퀵 서비스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 딸에게서 음식 배달 알바를 자전거로도 한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고씨 집안 누군가가 아침부터 배달을 시킨 걸로 여기며 관제실 밖으로 나갔다.
"어디로 배달합니까?"
"고독주 씨 당사자입니다."
백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용물이 뭡니까?"
"샌드위치입니다. 7시 10분까지 대면 전달해 달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저한테 주시면 됩니다."
백 씨가 영원수가 들고 있던 종이 가방을 받으려 손을 뻗었다. 영원수는 몸을 비틀며 샌드위치를 품에 안았다. 백 씨는 순진한 배달원을 보며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여기가 무슨 일반 주택가인 줄 알아요? 외부인 출입 안되니 저한테 맡기세요."
"그..."
영원수는 샌드위치가 든 가방을 더 꼭 붙들었다. 영원수는 이런 대저택에 와본 적도 없고, 대저택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리 만무했다. 미션에 장애가 생기자 그녀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야 했다.
알바생이 유급 휴가를 받는 건 로또만큼이나 운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영원수는 초조한 마음으로 고독주의 연락을 기다렸었다. 고독주의 지시대로 휴가 기간 동안 그림을 더 많이 그리려고 했다. 실제로 스케치북 앞에 몇 번이나 앉았다 섰지만 도저히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 김 비서의 무반응, 고독주의 쓸쓸한 목소리가 생각날 뿐이었다. 이기적으로 자신의 이득만 생각해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영원수에게 고독주는, 단순한 고용주가 아니라 고맙고 좋은 사람이었고, 좀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도 뭐라고 딱히 이름할 순 없었지만, 아무튼 특별한 건 맞았다. 영원수는 그에게 계속해서 좋은 사람이고 싶었다.
고독주의 집이 어디 있는지는 이미 뉴스로 접해 알고 있었다. 뉴스를 조금이라도 본 사람은 회운구의 고소각이 어디 있는지, 누구의 집인지 알았다. 지도 어플에서 검색만 해도 바로 뜰 정도였다. 고독주가 정말 자신의 할아버지와 살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행동파 영원수는 일단 샌드위치를 만들어 포장하고 집을 나섰다. 운전면허는 없었고, 고소각 앞까지 가는 대중교통은 없었다. 결국 그녀는 따릉이를 타고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이렇게 만나지도 못한 채 갈 수는 없었다. 그 간절함과 미션을 성공해야 한다는 의지는 그녀로 하여금 한 번 더 행동하게 한다.
영원수는 스마트폰을 켜고 고독주에게 전화를 했다.
* * *
가족들에 붙들려 아침 식사 자리에 참석한 고독주는 밥 한 톨도 먹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이지만 벌써부터 소화불량이었다. 지난 이 주일 동안 고독주는 소화제를 먹지 않은 날이 없었다. 소화의 원인은 병원에 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스트레스. 할아버지와 부모님은 좀처럼 식사하지 않는 고독주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들의 목적은 고독주가 아침 식사를 같이 하는 데 있지 않았다. 소화 불량을 일으키고 있는 건 고독주만이 아니었다. 다른 가족들은 아침 식사 자리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후계자에 대한 창업주의 분노는 시끄러운 고우나마저 입을 다물게 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음식물을 씹고, 그릇에 수저가 부딪히는 소리만 나던 조용한 아침 식사 자리에 진동 소리가 울렸다. 고독주의 재킷 안 쪽이었다. 가족들은 흘깃 고독주를 보다가 다시 식사를 이어가려 했다. 고독주가 폰을 보며 자리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기 전까지.
고독주는 뒤에서 부르짖는 어머니의 외침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빠르게 현관문을 나섰다. 현관문에 서 있던 김 비서 역시 무슨 상황인지 파악도 하지 못한 채 고독주의 뒤를 따라 뛰어갔다.
영원수는 여전히 샌드위치를 꼭 품에 안고 있었다. 자신을 미친 사람 보듯 내려다보는 백 씨의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롱패딩 때문인지 등에서는 땀이 조금 났다. 영원수는 아무래도 자신의 막무가내 업무 수행으로 백 씨의 업무를 방해한 듯하여 조금 미안했다. 그때 대문 사이로 고독주가 뛰어오며 영원수의 이름을 외쳤다. 달려오는 고독주를 발견하고는 이제껏 지어본 적 없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어서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달려오는 고독주의 얼굴은 전보다 아주 많이 핼쑥해져 있었다.
대문을 지나 온 고독주는 영원수 앞에서 숨을 골랐다. 겨울철 찬 바람을 맞아서인지 볼이 붉어져 있었다. 영원수는 그의 안색을 재빨리 살피면서, 샌드위치 가방을 꼭 쥐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고독주는 말하고 싶은 것이 많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영원수도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녀는 고독주에게 샌드위치를 건네며 말했다.
"1시간짜리 알바생에게 이주일이나 유급 휴가를 주는 고용주는 없습니다."
그녀가 고독주의 가슴팍에 샌드위치를 들이밀자, 그는 두 손으로 샌드위치를 받아 들었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반짝였고, 그 속에서 강인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변함없이 무표정이었다. 고작 이 주일이었다. 그가 그녀를 보지 못한 날 수가. 고독주는 지난 이 주일 간 멈췄던 심장에 피가 도는 것 같았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한 시간 같았던 지난 시간이 실제 있었던 시간인가 싶을 정도로 반가웠다. 그녀의 머리칼은 정전기로 부스스했지만 햇살에 비쳐 반짝였다. 평소처럼 무표정하지도 않았다. 자신을 반기는 것 같았다. 헤어진 검은색 크로스백도 여전했다. 고독주는 이 추운 겨울에 봄을 맞이한 사람처럼, 아니 그의 마음에는 이미 꽃잎이 하나둘 피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영원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따뜻했고, 입에선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고독주는 지금 당장 그녀를 안고 싶었다.
지영은 아들의 웃음을 보고 나서야, 아들이 10대 이후 자신 앞에서 한 번도 웃어본 적이 없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지영의 뒤로 고씨 집안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동문이 가족들 사이 까치발을 들어 영원수의 얼굴을 확인하곤, 제 엄마 옆으로 다가가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했잖아. 저 여자 진짜 또라이라니까?"
"또라이니까 독주랑 만나지."
집안 후계자에 대한 엄마의 냉소적인 평이 지나치다고 생각했지만, 곧 이어진 말에는 어쩐지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독주가 돈만 많지, 말을 하기를 해, 리액션이 있기를 해. 아니면 재미라도 있던가. 남자로서 아무 쓸모없는 애라니까? 분명 연애 한 번도 안 해봤을 거야. 그렇지?"
실제로 동문은 고독주가 연애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캐물어도 고독주에게서 없다는 답만 들을 뿐이었다. 그저 사생활을 언급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영원수를 대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엄마의 말이 아주 가능성 없는 얘기 같지도 않았다. 그때 고소득이 기침을 하며 걸어왔다. 가족들은 영원수와 고독주를 보다 말고 길을 텄다. 김 비서가 고독주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독주는 할아버지를 보고 영원수 앞에 섰다.
영원수는 자신의 시야를 가린 고독주 뒤에 서서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고개를 기울였다. 뉴스에서만 보던 인물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고소득은 손주 뒤에 서 있는 영원수를 한 번 스윽 보더니, 어느 때보다 차가운 눈빛으로 손자를 노려봤다. 고독주는 직감적으로 할아버지의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이 긴장감을 가장 먼저 깬 건 다름 아닌 영원수였다.
"그럼 이제 가보겠습니다."
영원수의 행동에 고씨 집안사람들과 직원들 모두가 입술을 깨물었다. 영원수는 사람들이 왜 이리 몰려있는지 아직 파악이 되지 않았다. 고소득에겐 자신의 출입을 왜 막았는지 묻고 싶었지만, 할아버지를 향한 고독주의 긴장감을 느꼈기에 말을 아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영원수 입장에서는 표면적으로, 고독주와의 고용 계약 이행을 위해서 그에게 아침 7시 10분까지 샌드위치를 전달하러 온 것뿐이었다. 진심은 당연히 고독주가 걱정되서였기 때문이었다.
"영원.."
손주가 손을 뻗어 영원수를 붙잡으려 하자, 고소득이 저택이 울리도록 호통을 쳤다.
"어디 벌레 같은 것하고 상종을 해!"
고독주는 경악하며 할아버지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제껏 자기 인생에서 할아버지를 이토록 혐오한 적이 있었는가. 고소득 역시 처음 보는 손주의 눈빛과 표정에 내심 당황했다. 하지만 분노가 더 컸다. 완전 무결한 손주는 앞으로도 완전 무결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굳건하게 손자를 훈계할 의무가 있었다. 고소득이 영원수 따위에게 눈길 한 번 주고 만 이유도, 손자에게 전하는 메시지였다. 계속 볼 인물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새 영원수는 고소득의 두 걸음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었다. 이런 당돌한 걸 보았나! 고소득은 그렇게 생각하며 영원수를 노려보았다. 고독주가 할아버지에게 혐오감을 느끼던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벌레 같은 것이, 저를 가리키는 말씀입니까?"
고소득은 아주 오랜만에, 자신의 눈을 똑바로 보는 인물을 마주했다. 그는 설탕 가게를 식품 대기업으로 일구기까지 산전수전 다 겪은 인물이었다. 고소득은 당황스러움을 드러내지 않고, 영원수를 먼지처럼 여겼다. 영원수는 자리에 서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고소득은 영원수보다 키가 작았지만, 턱을 치켜든 눈빛으로 마치 내려다보듯 응시했다.
너 말고 여기 누가 있겠느냐.
고소득의 눈빛에서 뜻을 읽은 영원수는 그에게 단호히 말했다.
"사과하십시오."
그 말에 옥명이 휘청하며 막내아들의 팔을 붙잡았다. 집안사람들은 영원수에 대해 놀라워 하거나, 경멸하거나 입을 다물었다. 지영의 눈빛은 특히 차가웠다. 사과 요구에 고소득은 희고 두꺼운 눈썹을 찌푸렸다. 손주에게 들러붙은 벌레 같은 계집의 말에 조소를 흘렸다. 고소득은 손주들이 하나같이, 여자 보는 눈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뒷짐을 진 자세 그대로 몸을 돌려 본가로 향했다.
영원수가 따라가려는 찰나, 고독주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영원수는 그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흐트러질 것 같았다. 그래서 돌아보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예상이 됐다. 또 그가 이주일 동안 겪은 일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 짐작이 됐다. 지금에서야 전후 사정을 이해한 영원수에겐 아주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이 주 전에는 아마 고독주에게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고소득이 집안으로 들어간 걸 확인한 집안사람들은, 영원수와 고독주를 보고 혀를 끌끌 차며 한 마디 씩 하고 들어갔다. 고독주는 영원수의 귀를 두 손으로 막았다. 꾸욱 눌렀다. 아무 소리도 들어가지 않도록. 영원수는 이러다 고막이 터지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됐지만 잠자코 있었다. 두 손이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영은 보다 못해 몸을 홱 돌렸다. 눈물을 글썽였지만, 시아버지의 뜻을 되새기며 본가로 들어갔다.
* * *
가족들이 모두 사라지자, 고독주는 김 비서에게 출근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김 비서가 영원수에게 인사를 하고 대문 안으로 향했다. 영원수는 몸을 돌려 고독주를 올려다보았다. 고독주는 자신의 마른 손으로 얼굴을 몇 번이나 쓸어내렸다. 영원수는 그의 긴장이 조금씩 풀리는 걸 지켜봤다. 손끝이 멈추며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할아버지를 마주하고서도 여전히 무표정인 영원수를 보며 고독주가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본부장님이 잘못한 일이 아닙니다."
"제 가족들이 영원수 씨에 대해 잘 모르고 하는 말이에요."
"괜찮습니다. 본부장님과 제 사이를 오해하신 것 같은데, 본부장님이 잘 설명해 주세요. "
고독주는 영원수의 말에 눈썹이 찌푸려졌다. '오해'라는 단어가 귀에 거슬렸다.
집안에 그녀와의 계약에 대해 알려지고 나서, 고독주는 가족들의 과잉 반응에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오해라고,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영원수는 고독주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그녀의 독특한 사고방식이 재밌고, 성실함에 감탄할 때가 많았으며, 그녀의 삶이 더 풍성해질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주고 싶었고, 자신의 고민을 나누고 싶었고, 그녀를 만나면 만날수록 더 보고 싶었다. 지난 2주간은, 영원수에 대한 고독주 자신의 마음이, 가족들이 짐작한 방향으로 이미 기울어져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영원수를 결단코 가족들과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다고 결단하는 시간이었다. 고독주는 자신의 가족들을 잘 알기에 그들이 변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영원수는 영원수 본인의 가족들에게 이미 상처를 많이 받아 자랐었다. 고독주의 가족들에게까지 상처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오해? 영원수는 자신과 같은 마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독주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를 알리 없는 영원수는 일렁이는 고독주의 눈을 보며 미소 지었다.
"정말 괜찮습니다."
고독주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영원수의 고개가 더 젖혀졌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고독주에게선 씁쓸하면서도 어쩐지 분노도 느껴졌다.
"괜찮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네?"
영원수는 자신은 상처받지 않았으니 안심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정말이었다. 서비스 일을 하며 수많은 진상 손님을 겪어온 영원수에게 이런 정도의 수모는 대수롭지 않았다. ‘벌레 같다’는 고소득의 말에도 감정적으로 화가 나진 않았다. 명백한 모욕적 언사에 정당한 반응을 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고독주는 자신이 말을 더할 때마다 점점 화가 나는 것 같았다. 목소리는 더 낮아지고 가까이 다가오는 숨소리는 거칠었다. 한 겨울 아침인 야외인데도 그의 피부에서 열이 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영원수는 반 발짝 떨어지려 했지만 그의 눈빛이 자신을 붙잡는 것 같아서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적 압박이었다. 영원수는 그의 눈빛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왜 화가 나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화 안 났습니다."
고독주의 뜨거운 숨이 닿자, 영원수는 억울한 감정에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러나 영원수는 고독주의 눈을 보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분노만이 아닌 다른 무언가의 감정. 그 감정을 알아챈 순간, 가슴이 조여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영원수는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고독주의 눈빛을 마냥 거부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고독주는 혼란스러워하는 영원수의 미세한 표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에게 자신의 감정이 제대로 전달됐음을 직감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자신의 감정을 그녀에게 강요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사마귀나, 동물이나 할 법한 행동이었다. 고독주는 그녀가 살면서 가장 큰 인내심을 발휘하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영원수에게 고독주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처음 생긴 '친구'였다. 일을 주었고, 그림 그리는 시간을 주었다. 자신에게 그의 마음도 보여주었다. 자신이 만든 샌드위치와 커피를 맛있게 먹어주는 표정 하나하나, 무표정인 자신을 보며 짓는 웃음도, 이렇게 화내주는 모습까지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와의 아침 식사는 영원수에게 단순히 일이 아니었다. 매일매일의 한 시간이 하루를, 일주일을 살게 했다. 고독주란 사람은 자신에게 너무 크고 무거운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때 영원수의 머리에서 한 마디가 울렸다.
올려 보내지 말라는 회장님 지시가 있었습니다.
가슴에서 무언가 울컥 올라왔다. 입술이 떨렸다.
고독주는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가 사랑하는 가족들은 영원수를 11층으로 올라가지 못하게 했다. 고독주는 11층에 있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을 만나러 매일 1층으로 와주었다. 그리고 자신을 11층으로 올려 보내준 사람이었다. 그는 계속 11층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1층의 사람인 영원수는 그를 보러 올러가고 싶지만, 앞으로 그를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자 영원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 해고하시나요?"
영원수는 차마 제 입으로 해고를 해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모든 걸 그에게 맡겨버리고 싶었다. 자신의 욕망을 끊어내 달라고. 영원수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리는 투정이었다. 영원수의 울먹이는 목소리와 욕망 어린 눈빛을 본 고독주는 그녀의 팔을 잡고 자신의 가슴으로 당겼다. 그는 영원수의 정전기 가득한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영원수는 그의 품에 안겨 셔츠를 젖히고 말았다. 턱이 떨리고 손이 떨렸다. 영원수는 고독주의 말을 기다리면서 처음으로 두려웠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두려운 말이 아니었다.
"나와의 계약, 후회하지 않습니까?"
그에게 기댄 채 있던 영원수는 고독주의 말에 깜짝 놀라며 고개를 홱 올려다보며 고개를 황급히 저었다.
"당신이 더 손해를 볼까 봐 걱정돼서 하는 말이에요."
고독주는 영원수를 내려다보다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머리 위에 턱을 얹었다. 영원수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그의 턱을 간질였다. 고독주는 그녀를 꽉 안았다. 암사마귀 안에서 숫사마귀에 더듬이를 발견했을 때보다 훨씬 큰 책임감과 사명감이 그의 전신을 타고 흘렀다. 이제 정말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고독주는 영원수의 두 팔을 쥐고 살짝 떨어뜨리며 빙긋 웃었다.
"그럼 계속 가봅시다."
영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자신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를 믿어서였다. 아니, 믿음조차 넘어선 감정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감정과 삶을 고독주에게 내맡겼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