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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nald May 28. 2019

갑자기 도쿄

일단 떠나기만 하면 어떻게든 여행은 잘 다녀졌다

가고 싶은 여행인지 아닌지를 구분해야 할 때면 여행지를 떠올릴 때 마음이 살랑살랑해지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여행지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내가 자연스레 연상되고 그 장면들을 생각할 때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면 이번에는 진짜라는 확신. 4월의 도쿄, 봄, 벚꽃이란 단어들을 떠올리자 마음이 살랑거렸다. 그래서 소멸 직전의 마일리지로 도쿄행 티켓을 끊었다. 출발일이 5일 후인 항공권이었다.



공항의 풍경은 왠지 모를 귀여움이 있다. 거대한 비행기들이 꼬리를 나란히 하고 승객을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유유히 제 갈길을 가는, 사실은 작지 않은 자동차가 레고 장난감처럼 여겨지는 순간이다. 마치 걸리버 옆에 서있는 소인국 사람처럼 압도적인 스케일이 자아내는 귀여움이 바로 공항에 있다.



첫 끼니는 아후리 라멘. 십여 년 전 일본에서 처음으로 찾았던 이치란 라멘의 도서관식 좌석을 떠올려보면 아후리는 그야말로 적나라하게 주방을 드러내고 있었다. '에그머니나, 속이 훤히 보이는 라멘집이라니..!'라는 생각도 잠시, 면을 삶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육수를 붓고 차슈와 반숙 계란을 올리는 신속한 과정을 관객의 마음으로 즐겁게 지켜봤다. 유자 향이 나는 매운 라멘은 시큼하고 알쏭달쏭했지만 국물을 끝까지 호로록 마시게 만드는 맛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비가 들이쳐 한기를 느끼던 찰나에 뜨끈한 국물이 몸속으로 들어가자 이제 좀 살 것 같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라멘 한 그릇을 말끔히 비우고 달아오른 얼굴로 가게를 나섰다.



갑자기 도쿄에 갔더니 대부분 비가 왔고 그리하여 비 오는 날 찾은 우에노 국립서양미술관. 운이 좋게 르 코르뷔지에가 만든 건물에서 <르 코르뷔지에 : 순수주의의 시대> 전시를 관람할 수 있었다. 건축보단 파리로 거점을 옮긴 청년 에드아르 잔느레(르 코르뷔지에의 본명)의 회화, 출판 그리고 가구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그의 다양한 활동을 조명해주는 전시였다.



"저기.. 이곳에는 서양화밖에 없는 것 같은데 일본화는 어디에 전시되어 있나요?"라는 한 외국인의 질문에 직원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죄송하지만 여기는 국립서양미술관인데 일본화를 감상하시려면... (중략)"과 같은 대화가 쿠르베 그림 앞에서 오갔다.



다음번에 도쿄에 간다면 츠지한을 갈지 말지를 고민하는 대신 몇 시에 가야 조금 덜 기다릴 수 있을까를 생각할 것이다. 그래봐야 기다리긴 하겠지만.



사진에서 보던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를 건너며 고개를 드니 츠타야-스타벅스 2층에 있는 사람들이 육안으로도 확인될 정도 가득 차 있었다.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보단 창가에 서서 바깥을 보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카페, 웅성거리는 이야기 소리보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분주히 들렸던 장소, 내국인보다 외국인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곳, 그리고 무엇보다도 창가석에 앉아 인스타 라이브를 하는 외국인들이 있었던 스타벅스로 기억될 것 같다. 핸드폰 화면에 비친 횡단보도를 건너는 행인들 머리 위로 하트가 뿅뿅 떠다녔다. 시부야 거리에 그야말로 사랑이 넘쳐흘렀다.



카페인 공급이 한참 늦어진 탓에 스톨 의자에 휘청거리는 몸을 겨우 바로잡고 앉아 무서운 속도로 아이스 라떼를 흡입했다. 천장이 높고 시야가 탁 트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찍은 사진을 넘겨보다가 커피를 마시는 사람, 잡지 <Milk>를 훑어보는 사람, 동행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스타벅스와 츠타야 서점을 지나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에스컬레이터에 몇 차례 몸을 실은 후에야 다다를 수 있는 은밀한 장소였다.



늦은 점심을 먹은 날은 늦은 저녁을 먹었다. 가게가 워낙 소규모인 까닭이겠지만 저녁 9시에도 웨이팅을 하는 경험은 신기하고도 충격적이었다. 마침내 순서가 되어 안내를 받은 후에는 신중하게 메뉴를 골라 첫 번째 접시가 도착하길 기다렸다. 그리고 주문한 마끼와 쥬도로를 먹은 후 나는 바로 스시를 추가하기 위해 다시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스시가 어땠냐고 묻는 주방장에게 엄지를 척 들어 만족도를 표하고 기분 좋게 값을 치르고 나왔다.



완벽한 여행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바로 돈과 시간이 넘쳐나는 여행.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아 회사를 다니면 주머니가 두둑해졌지만 상대적으로 시간에 쫓겼고 시간이 넘쳐흐를 때는 당연히 여행 경비가 빠듯했다. 하지만 그렇게 여행 가기 완벽한 때를 기다리는 대신 이제 나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부지런히 가방을 꾸린다. 금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있는 미래는 아주 아주 먼 훗날이 될 수도 아니면 앞으로도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론 흥청망청 돈을 쓰고 어떨 때는 허리띠를 있는 힘껏 졸라매며 효율성이란 단어를 당당하게 입에 올린다. 일단 떠나기만 하면 어떻게든 여행은 잘 다녀졌기 때문이다.




〰️ 아무튼 벚꽃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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