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끼도리 분라쿠
퀸즈 벌스데이에 여왕님 생일파티를 빙자해 시드니 근교로 여행을 간 때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오후, 점심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당시 인기를 끌고 있던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 도쿄 편을 보기 시작했다. "아오.. 맛있겠네..."라는 진심이 담긴 탄성도 잠시, 배불리 점심을 먹은 친구들은 앉은자리에서 하나둘 까무룩 잠이 들기 시작했다. 한껏 달궈진 뜨거운 기름에 치킨 카츠가 자글자글 튀겨지던 소리, 나무 도마 위에서 탕탕 탕탕탕-하고 파를 써는 경쾌한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ASMR에 귀를 쫑긋하고 화면 속 음식에 영혼을 빼앗긴 사람처럼 혼자 멍하니 티브이를 보고 있었더니 어느새 한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친구들은 여전히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고 티브이 소리가 끊긴 거실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끊임없이 이어진 일본 요리의 향연 때문이었을까 프로그램을 다 보고 난 뒤 왠지 모를 허기가 느껴졌다.
도쿄 여행이 결정된 건 갑작스러운 이유 때문이었다. 치밀한 계획이 앞섰다기 보단 일단 충동적으로 비행기 티켓부터 끊고 시작된 여행이었고 그러던 차에 떠오른 게 바로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였다. 일 년 전 나는 도쿄 편에 나온 다양한 음식들을 보며 거의 앓아누울 뻔했지만 안타깝게도 기억은 세월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이제 겨우 두어 가지의 키워드를 기억해낼 뿐이었다. 닭꼬치, 치킨 카츠, 츠키지 시장, 이렇게 세 가지. 타겟을 정한 뒤엔 곧바로 검색을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니터 위로 그날 티브이로 본 익숙한 가게의 풍경이 띄워졌다. 야키토리 분라쿠. 마지막 날 밤에 먹는 꼬치구이는 맛이 없기도 힘들지 않겠냐며 나는 두 눈을 반짝이며 구글맵에서 장소 추가 버튼을 클릭했다.
해가 지고 찾은 우에노 거리는 회사를 마치고 출출한 배를 채울 겸 시원한 맥주를 한 잔 하러 온 현지인들과 관광객들이 더해져 어중간한 낮시간 때보다 더 활기를 띠고 있었다.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자 가로등과 건물에 붙어있던 무수한 간판들은 일제히 거리를 환하게 비췄고 가게들은 저마다의 인기 메뉴를 내걸고 호객 행위를 하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4월의 도쿄는 봄기운이 완연했는데 또 저녁이 되면 적당히 선선해져 활동을 하기엔 여러모로 참 좋은 날씨였고 무엇보다 맥주 한 잔에 꼬치구이를 먹기엔 더없이 좋은 날이기도 했다.
야끼도리 분라쿠에 도착하니 운 좋게 카운터석이 남아 있어 얼른 자리를 꿰차고 앉아 분주히 메뉴판을 훑기 시작했다. 프로그램에 나왔던 간과 염통 같은 특수부위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섣부른 도전을 하는 대신 안전하게 닭껍질과 허벅지살을 주문하기로 했다. 그리고 닭꼬치와 최고의 궁합은 역시 구운 파라며 파 꼬치를 추가하고 티브이에서 본 니꼬미라 불리는 미소를 베이스로 한 두부 요리도 한 접시 추가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테이블마다 예의 그 두부요리가 놓여 있어 안 시킬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곧 자리로 맥주가 서빙되었고 가볍게 꿀꺽-하고 한 모금을 마셔보았다. 첫맛이 고소하고 달큰했다.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는 주방 앞에 앉아있어서 그런지 그날따라 유독 맥주가 더 시원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주문한 메뉴가 하나씩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니꼬미는 젓가락으로 두부를 커다랗게 뭉텅 잘라 곱창과 함께 먹으니 정말 기가 막힌 맛이 났다. 뜨끈한 두부가 들어가자 얼큰하게 취기가 올라왔는데 이 든든한 두부 스타터가 원망스러웠던 이유는 이후에 먹은 닭꼬치가 너무 맛있었기 때문이다. 허벅지 구이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맛이었지만 고소한 맛과 쫀득한 식감으로 요약할 수 있는 닭껍질 구이는... 그야말로 예상을 뛰어넘는 맛이었다. 평소 닭날개처럼 기름지고 바삭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껍질만 따로 떼어내 단일 메뉴를 만드는 기발함에 한 번, 불에 잘 구워 바삭하고 쫀득한 식감에 다시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소한 맛에 감탄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음번에 분라쿠를 찾는다면 배가 부른 두부 요리 대신 무조건 닭껍질! 소금으로 간을 한 닭껍질 여러 꼬치로 배를 채우는 호사를 누릴 것이다.
"하아...." 혼자 닭꼬치에 감탄하다가 잠자느라 이 음식을 구경도 못했던 친구들에게 꼬치구이 사진을 전송하기로 했다. 친구들은 역시나 예상대로 한밤중에 도착한 테러 사진에 배 아파했고 "아오.. 맛있게따..", "내일 점심에 KFC라도 가야 하나.."와 같은 부러움 가득한 텍스트를 보내와 나는 카운터 석에 앉아 혼자 웃음을 터뜨렸다. 흐뭇한 미소를 띈 채, 마지막으로 남은 닭꼬치 한 조각과 맥주잔을 깨끗이 비우고 가게를 나섰다. 어둠이 짙은 밤하늘 위로 커다란 달이 홀로 휘영청 밝은, 도쿄의 마지막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