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무 vs. 네임 밸류
그렇게 코로나로 2-3학년을 보내다가 여름 방학에 첫 인턴을 시작했다. 당시 코로나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황이라, 인턴 자리를 구하는 것조차 어려워 “금턴”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코로나가 거의 사라진 2024년 10월 현재도 크게 다를 바는 없어 보인다. 인턴을 구하려면 인턴 경험이 있어야 하고, 취업을 하려면 경력이 있어야 한다. 하다 못해 아르바이트를 하려 해도 아르바이트 경험이 있어야 한다. 가끔은 대체 어떻게 살아남으라는 건가 싶다.)
인턴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누구나 그렇듯 진로 탐색 및 스펙 쌓기였다. 학교에서 실제로 대학 생활을 한 기간은 1년에 불과했고, 그 이후 2년 동안 쌓아온 대외활동 경험은 미미했으며, 온라인 강의에서 얻은 인사이트 역시 크게 와닿지 않았다. 애매한 시기에 명확한 수를 둬야할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3학년 2학기가 되어버렸는데, 내년이 되면 벌써 취업을 준비해야 하니까 말이다.
두려웠다. 학교는 1년 밖에 다니지 못했는데, 2년 동안 온라인만 들으며 집에 갇혀 살다보니 어느덧 취업을 준비하는 시기가 찾아와버렸다. 나는 내 적성이 어느 분야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내가 뭘 잘하는지, 좋아하는지는 어떻게 아는 거야? 내가 과연 무사히 취업할 수 있을까?
그렇게 3학년 1학기부터 인턴 지원을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직무에 집중해야 할지, 아니면 기업의 규모를 우선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끊이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직무면 아무도 모르는 갓 태어난 신생 기업이라 하더라도 가야 하나? 대기업이면 내가 궁금해 하는 직무가 아니더라도 일단 지원해야 하는 건가?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질문들이 무수히 쏟아졌다.
결국 나는 기업의 규모라는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단 내가 알고 있는 기업이 몇 안 되는데, 그 범위에서 벗어난 스펙만 쌓으면 취업도 결국 그 수순을 밟게 될 것만 같았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살아놓고 중소기업에 가고 싶지 않았다. 뉴스에서는 이를 자만이라고 표현한다. 그런가, 내 욕심인가? 취업 시장에 제대로 뛰어들면 이런 자만심도 끝이겠지? 그 많은 걸 했는데도 안 되는 걸까? 대체 뭘 더 해야 대기업에 갈 수 있나 싶다. 그저 처음부터 불가능한 목표였을까?
하지만 우리의 미련함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명문대-대기업 루트를 꼭 따라야 한다고, 아니면 실패한 인생이라고 평생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이제 와서 자만이라고 버리기엔 우리는 한평생 이 목표만을 위해 살아왔다. 갑자기 이제와서 스스로의 손으로 실패한 인생의 시작을 열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사회는 아직까지도 대기업과 전문직 외의 경로를 용인하지 않는다. 우리가 “오만함”을 버리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직업이 아닌 직무를 택하는 순간 매일 그 선택으로 인해 우리의 가치는 평가절하당할 것이다. “요즘 뭐하고 지내?”라는 질문에도 목이 막히는 기분을 매일 느낄 것이다. 이미 지금도 “어느 회사에서 인턴 해?”라는 질문에 부담을 느끼는데, 실제 직업은 어떻겠나. 그리고 우리 사회의 이러한 분위기는 아마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책 지위 게임에서 윌 스토는 말한다.
연구에 따르면 뇌의 보상 체계는 절대적 보상보다 상대적 보상이 주어질 때 가장 많이 활성화된다. 우리는 그냥 더 많이 얻을 때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보다 더 많이 얻을 때 가장 행복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남들보다 더 많이 얻기 위해서 기준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기준이 없다면 “더 많이”도 없으니 말이다. SKY와 같은 대학교 서열, 대기업 순위,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 아파트 보유 여부 및 매매 금액 … 심지어는 이렇게 굵직한 영역에만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연애를 할 때조차도 우리는 기준을 나눈다. 사람을 유형별로 나누고 “회피형”으로 분류되는 사람은 연애 시장에 들어올 자격마저 박탈한다. 육아에서도 자연분만을 하지 않으면, 모유를 먹이지 않으면, 영어 유치원을 보내지 않으면 나쁜 부모가 된다는 너무나도 무수하고 디테일하고 높은 기준들이 존재한다. 결국 매순간 우리는 “나쁜” 학생, 구직자, 직장인, 부모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