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다를 것 없이 살다가도 알 수 없는 회의가 물처럼 스며드는 날이 있다. 계기는 대개 아주 사소하거나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날은 그저 그런 날이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나 예고치 못한 사고처럼 전후 없이 마주하게 되는 우울감. 그날따라 재수가 없어 나쁜 공기를 들이마셨다고 생각하는 편이 속 편할지 모른다.
그런 순간 내가 반복해서 집어먹는 몇 가지 치료제가 있다. 바로 개 밥 먹는 소리다. 뜬금없이 뭔 개 밥 같은 소리냐,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 개 밥 먹는 소리에는 미묘한 평화가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개 밥 먹는 개 옆에 드러누워 오독오독 까득까득 하는 소리를 게슴츠레 듣고 있자면 세상만사 뭐 별거 있나 싶은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덧붙여 식사를 마친 개에게 뽀뽀 세례라도 받는다면 사료 냄새를 콧 속 깊이 느끼며 프랑스산 사료는 이런 맛이 나는구나 하며 화제를 완벽하게 전환시킬 수도 있다. 그대로 개를 끌어안고 이판사판 하고 잠들어버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최고다.
하지만 그날따라 개가 사료를 잘 먹지 않는다거나 여의치 못한 상황으로 첫 번째의 방법에 실패한다면 차선책으로 블로그나 필사노트를 편다. 다 읽은 후 리뷰를 하지 않은 책이 있다면 탁탁탁탁 타자를 두드리고 그렇지 않다면 좋아하는 시,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하는 시나 '물론 넌 상상할 수 없지' 하는 시. 그런 예술 같은 시들을 필사노트에 적어 내려간다.
화요일 아침부터 이틀간은 옅은 울적감이 햇살이나 달빛에도 아랑곳 않고 온 몸을 뱅글뱅글 둘렀다. 그리하여 선택한 건 개의 오독오독 소리를 들은 후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를 블로그에 리뷰하는 일이었다. 리뷰라고 해봤자 마음에 들었던 글귀들을 기록하기 위해 하는 일. 내 생각은 대여섯 줄의 끄적임으로 마무리짓고 본격적으로 명문 따라 적기를 시작하면 역시나..! 기분이 마구 좋아진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시간엔 정말 아무런 잡생각도 들지 않는다.
콩밭 메는 아낙이 베적삼이 젖도록 울고 있는 데다 포기마다 눈물을 심으며 밭을 매고 있다고 하고, 새만 우는 산마루에 홀어머니를 두고 시집와 버렸다고 하기에, 목이 메어 칠갑산을 부를 수 없다는 남자 주인공의 이야기에 아 뭐야 슬프고 웃겨, 하고 머리를 모니터에서 멀찌감치 떨어트렸다가 다시 뒷이야기를 이어서 적는 일. 그런 일을 한참이나 하고 있자면 잠시 후 사료를 전부 소화시킨 개가 내 엉덩이에 붙어 앉아 몸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여 자리를 잡고 잠이 든다. 리뷰를 대충 마무리하고 개 옆에 누워 결 따라 누운 그 털을 한참 쓰다듬고 나면 어느새 울적한 공기는 조금 옅어지고 배가 고파온다.
난 정말 좋은 작가들과 개가 없다면 이 세상은 못 살 것만 같아. 허공에 이야기를 하며 배달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나면 짜잔, 가벼운 우울 분자 퇴치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