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랑이 마지막이라면
사랑 앞에 서툰 우리들
생각해보면 언제고 그것이 끝인 것만 같았다. 깔딱깔딱한 목숨을 가진 사람처럼, 신이 내려준 마지막 기회를 놓쳐버린 사람처럼 그랬다. 어째서였을까. 세상이 무너질 듯 굴만큼 대단한 사랑을 한 것도 아니었으면서. 솔직히 말하자면 헤어진 다음 날에도 바닐라라떼는 달콤했고 새 신발은 예뻤으며 인생은 나쁘지 않게 돌아갔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었다. 그들처럼 진지하게 개와 고양이와 책과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줄 사람은 앞으로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내가 이별을 통보했다면 내 머리를 쥐어뜯고 그가 이별을 통보했다면 상상 속에서 그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사실 지난날 우리가 정말 개와 고양이와 책과 음악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긴 했는지, 이제와 보면 그것부터가 조금 의문이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봐도 애서가와 연애를 한 기억은 없다.)
시간은 예외없이 흐르고 현재의 나는 안정된 연애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연애를 제외한 모든 게 불안정하다는 것이 함정이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미래를 새 정부의 헌법 제정 수준으로 계획하고 그것을 차곡차곡 실행해가며 단단한 애정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쯤 되어 돌아보니 그때의 그 고질병은 결국 낮은 자존감에서 기생된 것으로 시야를 자신에게 돌려보면 어찌어찌 극복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로 넘어갈 줄 알았다면 상당한 오산이고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어도 딱히 달라진 건 없다. 연애 유목민인 지인들은 여전히 지난날의 내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안정된 연애를 유지해가는 수많은 지인들 역시 말한다.
「나 있잖아, 이 사람을 놓치면 이제는 정말 끝일 거라는 확신이 들어.」
후자의 이야기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지금 만나고 있는 연인과 함께 만들어 온 시간들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는 예쁜 의미가 기본적으로 내포되어있다. 덧붙여 지난날의 고질병, 이 사랑을 잃어버린다면 정말 나에게 주어진 사랑이 영영 끝나버릴 것만 같은 염려 또한 여전히 포함이다. 끈덕진 상실 바이러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흔해 빠진 상실감에 적당히 무뎌질 무렵에서야 나는 알았다. 우리의 고질병은 사실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 마음이 맞는 이와 함께 미래를 꾸려나가고 싶은 이들의 당연한 본능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앓던 이를 뽑고 상쾌한 아침을 마주한 인간 같은 기분이 되었다. 어째서 그간의 나는 수도사처럼 흔들리지 않는 마음만이 정상이라 정의하며 살았던 것일까. 애초에 그렇게 완벽한 감정 컨트롤이라는 건 인생 1회차에서는 불가능한 일 아닌가.
작가 황경신은 사랑을 갓 구운 예쁜 케이크를 들고 걸어가다가 넘어져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아이에 비유했다. 그렇다. 우리는 늘 사랑 앞에서 서툰 아이가 되고야 만다. 예쁜 케이크를 엉망으로 만들기도 하고, 흙투성이의 바보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갑작스레 찾아드는 모든 것에 대하여 매 순간 서툴 수밖에 없는 우리. 그러니까 사랑에 앞서서와 마찬가지로 사랑 뒤편의 서툰 마음을 다그치는 일 역시 사실은 바보 같은 짓이다. 사랑을 잃을까 안달하고 다시는 사랑받지 못할까 염려하고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구깃거리며 비뚤어진 상상을 할지언정, 결국은 괜찮다. 우리는 사랑 앞에 영원히 서툰 존재일 테니. 그 사실은 아무래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이 담담한 위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