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고칠 체력

by 지수연

덥고 습한 날씨가 한풀 꺾이고 드디어 가을의 경계선인가 싶었던 주말. 서촌의 어느 계단을 오르며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스물댓 개의 계단을 오르는 일이 까마득 힘겨웠다. 이 정도로 체력이 바닥인가, 스스로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곁에 있던 연인은 누가 보면 두오모라도 오르는 줄 알겠다며 웃었다. 이대로라면 다음 달로 예정된 엄마의 환갑여행에서 능숙한 가이드 역할은커녕 거추장스러운 짐짝이 될 것이 분명했다.


직업군인인 삼촌은 나를 보고 종종 말했다. 조카. 요가 같은 것 좀 그만하고 밖에 나가서 뛰지 그러냐. 몸에 땀을 내야 건강해지지, 맨날 허리 비틀고 다리 비틀고 그래서 무슨 근육이 생기겠냐.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온갖 핑계를 대며 말을 돌렸다. 아, 삼촌. 날도 덥고 시간도 없고 근력보다는 유연성이 어쩌고 저쩌고.


양심이 없는 대답의 표본. 나의 근력 부족이 요가 탓일리 있나. 이유는 단 하나. 내가 뺀질거려서다.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나는 운동이 싫었다. 못해서 싫었고 싫어서 못했다. 백 미터만 달려도 옆구리인지 아랫배인지 모를 곳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백 미터를 삼십 초 안에 들어가기도 버거웠으니 당연히 늘 달리기는 꼴찌. 태어나서 처음 다녀본 헬스장의 트레이너는 내 체성분 결과표를 보고 초등학생 여자애의 근육량도 이것보단 높은데,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고로 나는 지금까지도 젖은 솜 같은 몸으로 헐떡헐떡 계단을 오르는 것이다.




한동안 우울감이 마음을 짓눌렀다. 근 한 달가량이었다. 어느 날부턴가 나에게 주어진 일들이 버겁게 느껴졌다.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을 놓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그것을 비웃는 목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해결해야 할 일이 많잖아. 이 상황에서 너 혼자 행복한 건 무책임이지. 철이 없는 거지. 이건 어쩌고 저건 또 어쩔 건데. 시간이 없다니까. 모든 걸 다 완벽하게 해내란 말이야. 야, 내 얘기 안들려?'

끊임없이 다그치는 목소리. 그 끝에 마주한 첫 번째 증상은 견딜 수 없는 가슴의 뻐근함이었다. 속이 메스꺼워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데도 구역질이 났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다음엔 고요한 음악을 들었다. 나는 묘하고 우울한 것에 쉬이 빠져드는 사람. 재생목록을 그런 음악으로 채우는 것 따위는 일도 아니었다. 그리곤 다이어리에 글을 썼다. 주어와 동사가 맞지 않아도 모를만큼 날 것의 주절거림. 그렇게 몇 주를 지내니 다행스럽게도 이쯤에서 비생산적인 반복을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염없이 가라앉는 스스로를 오래 두고 보지 못하는 습성과 '죽어버릴 것이 아니라면 한 시라도 빨리 에너지를 만들어 내자' 결심하는 행동력. 까탈스럽고 게을러 빠진 나를 지금까지 이끌어온 유일한 장점이었다.


하지만 마음을 그렇게 먹어도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일이 온오프 버튼처럼 달칵 눌리는 건 아니었다. 쉽게 우울에 빠지고 또 오래 지나지 않아 빠져나오는 성향임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의 요소가 미달되는 시기에는 늪에서 빠져나오는 일이 쉽지 않다. 몇 가지의 요소 중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건 바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체력이다. 이번 슬럼프는 평소보다 조금 오래 발목을 잡았다. 이유는 유달리 더 심각해진 건강 상태였다. 몸이 건강해야 마음도 건강하다는 흔한 이야기에 새삼 고개가 끄덕여졌다.



몸과 마음의 균형이 맞지 않으면 그것이 어느 쪽이든 결국은 반대편을 붙잡고 무너지기 마련이다. 마음의 병에 따르는 것은 언제나 질병이고, 몸이 아프면 가장 먼저 고개를 내미는 것 역시 우울감이다. 어느 경우든 드물지 않다. 결국 어느 한쪽을 고치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을 함께 돌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튜브 영상이나 기고글을 보면 운동을 통해 마음의 병을 극복한 사례가 많다. 그들은 놀라우리만치 극과 극의 삶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한다. 하지만 그런 멋진 사례를 통해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기를 십여 년쯤 반복하고도 나는 지금의 나를 마주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다람쥐 챗바퀴처럼 같은 곳을 맴도는 이유는 더 볼 것도 없이 뻔하다. 욕심부린 목표치와 따라주지 않는 젖은 솜. 그리고 틈새를 파고드는 우울의 반복.




언어 학습에 대한 팟캐스트를 듣는 중 화자가 노암 촘스키의 자연발달론을 설명하며 이런 말을 덧붙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해서 나쁠 것 없다'는 말로 무조건적인 시도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학습에서 그것은 절대로 예외 되어야 할 접근이다. 학습은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그 스트레스는 성취를 통해 해소된다. 하지만 성취라는 결과를 얻지 못하면, 학습은 그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과정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니 방향성을 모른 채 무모하게 저지르는 시도는 지양하자는 취지의 이야기였다.


마음의 병이든 몸의 병이든 어느 한쪽을 위해 다른 쪽과의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우리네 삶의 필수 조건이라면 그것을 다루는 방법 역시 어느 정도 지혜로운 편이 좋을 것이다. 서촌의 계단에서 옆구리를 부여잡은 그날, 나는 나를 괴롭히던 우울감과 남은 나의 날들에 대해 오래 고민했고, 다음날부터 잠들기 전의 간단한 요가와 주 2회의 가벼운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매일 들여다보는 다이어리에 새빨간 글씨로 몇 문장을 적어 놓았다. 깃털처럼 가벼운 체력을 가지고는 마음을 다스리기도 만무려니와, 꿈의 실현이나 성장을 위한 노력도 힘겨울 것이라는 훈계조의 글이었다. 결과가 어떨지는 나도 모르겠다. 성취를 반복한다면 언젠가 후속편이 등장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다이어리를 들춰보며 스스로를 재촉할 것이다. 사실 둘 중 어느 쪽이어도 젖은 솜 같은 일상보다는 성공이지 않나 싶다.



keyword
지수연 가족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팔로워 700
매거진의 이전글사람도 꼬리가 있었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