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이 낮은 유전자예요.

모두가 더 나은 나를 바랄 뿐이다.

by 지수연

마음이 아픈 이들은 지난날에도 흔했다. 1900년대.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이 우울증과 불안장애의 원인을 어린 시절과 트라우마로 국한시키던 시절이었다. 과거를 되짚고 무의식을 깨닫는 일은 효과적이었지만 많은 이들이 제한된 치료법에 한계를 느꼈다. 무의식을 인지하고도 호전을 보이지 않는 환자들을 치료할 방도가 없었다.


시대의 중반이 흘렀을 즈음 몇몇 정신분석가들이 인간 정서에 대해 새로운 접근법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미국 콜롬비아 대학에서 임상심리학을 공부한 앨버트 엘리스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지나간 시간과 사건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것을 넘어 한 개인의 사고방식을 교정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반복되는 생각이 마음의 병을 만들어낸다 여겼고 환자의 비합리적 사고를 조목조목 반박하며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내는 일에 목적을 두었다. 결과는 꽤나 훌륭했다. 앨버트 엘리스는 그것을 정서 행동 치료라 부르며 환자의 사고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그의 시도는 훗날 아론 벡 등 여러 학자들의 손을 거쳐 실용적 치료법으로 확립되었다. 이것이 현시대 아주 높은 평가를 받는 인지 치료의 시작이었다.




어느 날 지인이 말했다. '나는 자존감이 낮은 유전자를 타고났어요. 자존감이 낮아질 만한 어린 시절의 사건이나 계기도 없고 결핍이 있는 환경에서 자라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어째서인지 다른 가족들도 저를 꼭 닮은 거 있죠. 그런 유전자가 있나 봐요. 조금 이상한 사람. 비밀이 많고 우울한 사람.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유전자요.' 사랑받을 만한 이유가 차고 넘치는 사람이 꾸밈없는 목소리로 말한다. 자신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라고. 심지어 그렇게 타고난 사람이라고.



나의 유일한 가족은 한때 마음의 병을 심하게 앓았다. 마음의 병은 몸의 병으로 번져 결국 실직 상태에 이르기도 했다. 현재는 길고양이의 밥을 챙기고 형제에게 먹을 것을 나누며 긍정적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한때는 그랬다. 지난날의 우울에는 많은 이유가 있었다. 어려웠던 환경과 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래. 너무나 섬세하고 여린 마음. 나와 가족은 외모도 성격도 다르지만 섬세하고 여린 성정은 꽤나 닮았다. 아직 나라는 사람의 초석이 제대로 세워지기 전, 십 대 후반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의 혼란하던 시절에는 그것에 꽤나 휘둘렸다. 여린 성정과 타인이 뿜어내는 불안한 마음들이 뒤섞이면 새까만 밤바다에서 뽀글거리는 거품 같은 기분이 되었다. 시체가 물에 녹아버린다는 물벼룩이 되고 싶었다.


지난날 사회와 타인이 쏟아내는 부정적 감정에 휩쓸릴 때에도 나는 휘청이고 외면하기를 반복했다. 세상이 나의 존재를 말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손사래를 쳤다. 맞다고. 아니라고. 사람들의 죽고 싶다 죽고 싶다, 를 듣고 있으면 나도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마음은 허무한 밤을 여러 날 보내고서야 부정할 수 있었다. '아니야. 사실은 나 살고 싶어. 잘 살고 싶어. 너무 잘 살고 싶은데 잘 살아지지가 않아서 착각하는 거야. 살면 고달프니까 죽으면 편할 거라고 위안하는 거야. 하지만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당장은 고달파도 언젠가는 행복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반복되는 생각을 잘라내는 일에는 치가 떨릴 만큼 다난한 과정이 숨겨져 있지만 다행스럽게 이 과정에도 습관은 든다. 허무감에 사로잡히는 일이 습관이 되듯 허무감에서 벗어나는 일도 습관이 된다. 이것은 자신이 비관적 무한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건너갈 수 있는 단계이며, 앨버트 엘리스와 아론 벡이 말한 인지 치료의 아주 기초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반복하던 부정에서 한 걸음을 옮겨보는 것.



유전자를 논하던 지인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그녀는 객관적으로 상당히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그녀만의 분위기가 잔뜩 묻어나는 멋진 외모는 물론이며 솔직한 성격과 유머러스함까지 무엇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구석이 없다. 그런 그녀가 자신은 자존감이 낮은 유전자를 타고났다고 말할 때 나는 마음속에서 어둡고 묵직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날 나의 목소리를 들었다. 사실은 죽고 싶지 않아. 너무 잘 살고 싶은데 잘 살아지지 않아서 그런 거야. 죽고 싶다고 말해도 사실 죽고 싶은 건 아니야. 자신에 대한 애정을 거부하는 사람은 없다. 낮은 자존감을 원하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복잡하게 말하지만 사실은 그저 더 나은 나를 바랄 뿐이다. 타인에게 사랑받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며 나 스스로 만족스러운 삶을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는 심리학자가 아니어서 그녀를 붙들고 어쩔 것이 없었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그랬다. 내가 그들에게 줄 것은 진실뿐이었다. 괜찮아. 자신에게는 솔직해도 돼. 너는 잘 해내고 있어. 나는 알아. 네가 하루하루 성장하고 있다는 것. 결국은 엄마를, 아빠를 용서할 거라는 것. 너 자신을 위해서 결국은 지혜로운 판단을 할 거라는 것. 결국은 지난 시간을 통해 배웠다고 말하게 될 거라는 것.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알아.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마. 정말로 네 탓이 아니야.


칭찬은 아니었다. 입에 발린 소리를 워낙 못하는 성격인 데다가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객관적으로 사랑받을 가치가 충분한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들은 그 사실을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으니 그저 말할 뿐이었다. 우리가 서로의 가치를 알아보고 밤을 견디고 낮을 보내며 조금씩 나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서로를 인정하는 일에 대단한 돈이나 정성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서글픈 고리를 뱅글뱅글 돌고 있을지 모를 누군가를 위해 어딘가를 툭 건드려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내가 아주 슬프던 시절 나에게 닿았던 예쁜 말들처럼, 그럴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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