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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라

그때 오해해서 미안.

by 솔라리스의 바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아키라>(오토모 가츠히로, 1988)를 봤다.

<아키라>(1988)의 시대적 배경은 2019년이다. <블레이드 러너>(1982)도 2019년. 80년대가 생각한 2019년은 무엇이었길래.

옛날에 비디오로 몇 번 봤는데, 극장에서는 처음이었다. 확실히 극장에서의 화면 스케일, 사운드는 남달랐다. 얼핏 촌발 날리는 것 같은 <아키라>의 사운드는 화면의 기묘함과 맞물려 이상한 고양감을 고취했다. 게다가 일본 버블 시대에 등장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애니메이션이라니. 초능력과 사이버펑크가 공존하는 SF물이라니. <스팀보이>(2005)에서도 그랬지만 천천히 모아서 한 번에 터트리는-마치 핵폭발을 은유하는 듯한-감독의 스타일이 대단한 영화였다. (어쩌면 일본의 무의식 중에는 원자폭탄이나 지진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너의 이름은> 같은 작품도 그렇고.)

<스팀보이>는 실로 대단한 시각적 쾌감을 준다. 극장에서 보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키라>를 떠올릴 때마다 옛날의 해프닝이 생각난다.


고등학교 다닐 때, 같은 반에 미술 하는 친구가 있었다. 아주 친하진 않았는데 어느 날 재수종합반에서 만났고 함께 학원에 다녔다. (좋았다) 키가 아주 크고 피부가 하얗고 굉장히 섬세한 소년이었던 그는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캐릭터를 곧잘 그리곤 했다. 나에겐 잘 보여주진 않았지만 그 친구의 방에는 온갖 수집품들이 가득할 거라 상상했다.


그리던 어느 날, 뜬금없이 <아키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런 애니메이션이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그 친구가 <아키라>를 언급하며 계속 감탄사만 연발하길래 (내용은 말해주지 않았다) 무슨 일본 야동인 줄만 알았다. (일본 야동 애니메이션 불법 복제 테이프가 유행했었다) 며칠 동안이나 <아키라>를 또 봤는데 참으로 대단했다는 말을 주문처럼 중얼거리던 그 친구에게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 좋은 것, 같이 좀 보자고.


그때 날 쳐다보던 그 친구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그 경멸의 눈빛. 더 이상 네 앞에서 <아키라> 얘기는 하지 않겠다는 말. 결국 친구는 <아키라>를 보여주지 않았고 짧은 재수종합반 시절 이후로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아키라>를 처음 봤을 때, 그 친구가 생각났다. 어제도 그 친구가 생각났다. 오해해서 미안. 하지만 처음부터 말해줬으면 좋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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