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솔라리스의 바다 Apr 22. 2023

존 윅 4

일개 개인이 조직에 맞서는, 판타지 영화

<존 윅 4>(채드 스타헬스키, 2023)을 봤다. (*스포 없음)


마치 하워드 혹스의 <리오 브라보>(1959)를 보는 것 같다.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한다. 시리즈 1편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봤다. 키아누 리브스라는 배우의 매력, 스타일리시한 총격씬, 그리고 개 때문에 복수한다는 소박한 내러티브. 모든 게 다 좋았다. 하지만 그중에서 이유를 하나만 말해 보라고 하면, 그건 조직에 맞서는 개인이라는 설정. 그것 때문이다. 


실제로 조직을 상대로 해서 개인이 찍소리라도 할 수 있다는 건, 판타지에 가깝다. (그렇다. <존 윅> 시리즈는 사실 판타지다.) 


오늘 기차에서 <1987>(장준환, 2017)을 보다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화 속에서 부장검사로 나오는 하정우는 사건을 대충 마무리하라는 차장검사, 지검장의 말을 듣지 않고 박종철의 부검을 지시한다. 말도 안 된다. 극 중 동아일보 기자로 나오는 이희준이나 사회부장은 보도지침을 어기고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을 기사화한다. 말도 안 된다. 이렇게 그 조직에 속해 있는 개인은 대부분, 조직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다. (대공수사를 담당하는 박희순이 대공처장인 김윤석의 회유와 협박에 굴복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존 윅이 값지다. 그는 죽은 아내가 남기고 간 개를 죽이고, 자신의 올드카를 빼앗았다는 이유만으로 한 때 자신이 몸담았던 조직을 붕괴시킨다. 시리즈가 거듭되면, 지하세계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최고회의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 그리고 기어이 승리를 쟁취한다. 


<존 윅> 시리즈를 보면서, <페이백>(브라이언 헬겔랜드, 1999)가 생각났다. 포터(멜 깁슨)는 자신의 돈 7만 달러를 되찾기 위해 조직을 찾아가고, 7만 달러를 주지 않는 조직을 무너뜨린다. 그쪽의 중간보스, 최종보스는 계속해서 포터에게 묻는다. 도대체 당신이 원하는 게 뭔가? 


그들은 단돈 7만 달러 때문에 죽음도 불사하는 포터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포터에게 열광했다. 조직을 상대하는 개인이라니.

조직은 믿을 수 없는 존재다. 개인적으로는 훌륭한 사람도 조직의 일부가 되는 순간, 개인의 특질은 사라지고 만다. 조직은 그런 개인의 희생과 열정을 자양분 삼는다. 결국 개인은 조직에게 배신당할 뿐이다. 그때가 일찍 오거나 늦게 오거나 할 뿐이다. 그러므로 조직에 충성할 필요도 없다. 받은 만큼만 일하면 된다. 조직이 가장 필요로 할 때, 자신을 위해 떠나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성공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렇다면 <존 윅 4>는 이런 나의 바람을 이뤄준 영화일까? 그것도 아니다.  (*스포 약간 있음)


존 윅도 최고회의를 파괴하지는 못했다. 윈스턴의 충고에 따라, 최고회의와 타협하고 만다. 그래서 결투를 통해 원하는 것을 최고회의로부터 얻어내는데 그친다. 왜냐하면, 우두머리를 죽인다 해도, 또 다른 우두머리로 바뀔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번 만들어진 조직은 조직원을 끊임없이 수혈하면서 생명체처럼 살아남는다. 그 전체를 파괴하는 건, 심지어 존 윅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나 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