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고실험 Apr 27. 2022

왜 오래 살고 싶냐구요?

논리적인 추론으로도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구요!

삶의 목적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에는 참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많을 것 같다.

그것들을 차근차근 이야기해 볼 생각인데 그 중에서 가장 원초적인 수준에서의 이야기부터 시작을 해 보자면 '죽기 싫다'라는 생각이 가장 기저에 있는 것 같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에게 죽기 싫다는 것은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적용이 되는 생각일 것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갖는 사람도 그 생각의 기저에는 '이렇게 살 바엔 이 시점에서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나도 인간답게, 행복하게, 즐겁게, 만족하며 살고 싶었다.'라는 생각이 깔려있다는 이야기를 정신장애인 시설에 있을때 들은 적이 있다. 삶의 이유를 잃은 사람들이 모두 이렇진 않겠지만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에게도 분명 소중한 것, 지키고 싶은 것이 있었을거라는 생각은 지울수가 없다.




내가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하는 것은 다분히 논리적인 사고의 결과물이었다. 나는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반박하지 못했기 때문에 살고있다'라고 이야기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그렇다고 누군가 내 생각을 논리적으로 반박한다고 죽고싶어지거나 그러진 않을 것이다. 지금 이야기는 어렸을 때 했던 논리적 추론이다.) 그 논리가 그렇게 어려운 논리는 아니다.

일단 첫 번째 전제는 '내 모든 인식과 판단은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라는 것이다. 마치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와 비슷한 전제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내가 인식하지 못하고 판단하지 못하면 나는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다시 낳을 수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또 다른 논의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야기하지 않기로 한다. 어쨌든 첫 번째 전제에 대우를 취하면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나는 인식과 판단이 불가능하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두 번째 전제를 더한다. '내가 인식하지 못하고 판단하지 못하는 대상은 적어도 나에겐 존재하지 않는 것과 차이가 없다.(=나에겐 의미가 없다.)'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태평양 해저 깊은 곳에 살고 있는 대왕오징어는 어떤 특수한 상황이 된다고 하면 내가 그 친구를 볼 가능성이 있고 맛볼 가능성(?)도 있다. 그러니까 그정도는 이 두 번째 전제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이 두 번째 전제의 대상은 너무 멀리 있고 너무 빨리 확장해서 관측 불가능한 우주에 존재하는 천제정도라면 어느정도 해당이 될 것 같다.

그러면 이 두 가지를 합하면 어떻게 될까. 전제 1의 대우. '내가 존재하지 않게 되면 내 모든 인식과 판단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전제 2. '내가 인식하지 못하고 판단하지 못하는 대상은 나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럼 3단 논법에 의해 '내가 존재하지 않게 되면 내 인식과 판단의 대상이 되었던 것들마저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라는 결론이 나온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쉽게 '죽으면 모든게 무슨 의미냐.'라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그 말은 인정하지 않고 살았었다. 죽었어도 의미있게 죽을 수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는데 그 사람을 잊을수가 있나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게도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할건가요? 이런 식의 생각으로 그들에게 맞서곤 했다.

하지만 그런 의미와 논리에 의해 이야기한 의미는 조금 다르다. 죽은 사람이 가지는 의미는 정지되었고 변화하지 않는 의미이다.(해석에 의한 의미의 변화는 논하지 않기로 한다.) 그것은 엄밀히 이야기하면 추억이나 기억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 맞다. 그리고 그 추억이나 기억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의미는 자의적 해석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사고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살아있는 것 자체로 의미이고 또 그 의미는 생각하고, 행동하고, 성장하고, 노화하는 의미이다. 그 변화는 이 모든 우주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들이다. 아주 짧은 순간들에서는 선과 악과 희노애락이 있고 가해자가 있고 피해자가 있으며 얻음과 잃음이 있다. 그리고 그 순간들에 우리들이 콕콕 끼어있으니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데 힘들고 어렵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이 우주가 비로소 모든 의미들의 집합체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주의 기운이나 그런 이야기를 하자는 것도 아니다. 거대한 미술작품을 보았을 때 물감 알갱이 하나가 황금빛이던, 잿빛이던, 흰색이던, 혹은 똥색이건간에 그것이 화폭 안에서 웅장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이 우주도 그러한 거대한 조화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 조화 속에서 내가 존재한다.

그렇기에 이 우주가 지금의 우주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없어서 다른 우주가 된다고 한들 그 또한 의미가 있는 우주이다.

그 우주속에는 내가 아니지만 또 다른 '나'들이 그 우주를 구성하고 있기에 언제나 의미는 이어지는 것이다.

이 속에서 내가 아주 조금의 욕심을 낼 수 있다면 나는 나의 의미를 조금 더 오래 지켜보고 싶다는 욕심을 부리는 것이다.

'오래 살고 볼 일이다.'라는 말을 좀 더 많이 하면서 살고 싶다.

그리고 그런 말을 이 세상 사람들이 아주 많이 하면서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드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해보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듣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