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공간의 물리적 조건 (1)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로부터 100일째, 전국 각지에서 탄핵 찬반 집회가 열리고 있다. 그런데 대규모 집회가 열리는 도시에서 정치적 의사 표현을 위해 시민들이 몰리는 공간들은 몇 곳으로 특정된다. 왜 시민들은 그 도시의 그곳으로 모이는 것일까.
(이 글의 작성 시점이 윤석열 대통령이 구속 취소로 석방되고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선고가 내려지기 전이라는 점을 밝혀둔다.)
가장 먼저 광장이 펼쳐진 곳은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이었다. 12월 3일 계엄 선포 직후 국회의원들이 계엄 해제를 위해 국회로 소집되고, 동시에 계엄군이 국회에 투입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한 시민들이 국회로 결집했다. 4일 새벽 시작된 국회 앞 집회는 민주노총,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 연대체인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 대개혁 비상 행동’ 주최로 14일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의결될 때까지 계속됐다.
국회 앞에서 광장이 펼쳐진 이유는 국회가 계엄 해제와 대통령 탄핵 소추의 권한을 가진 헌법기관이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대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주권자로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직접 내려고 한다.
각종 이해집단의 집회가 과거 청와대와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열리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최종 의사결정자에게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를 전하기 위해 정부기관 앞은 집회 장소가 된다. 탄핵 반대 쪽은 과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서울 광화문 경찰청, 서울 안국역 부근 헌법재판소 등 수사, 사법기관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그런데 이때 시민의 목소리는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권력을 향한 집회에서 시민은 음성이 권력자의 귀에 들릴 만큼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를 원한다. 정치는 대면 의사소통이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분야다. 재래시장에서 악수하고 눈 맞춤하는 전통적인 선거운동이 21세기에도 유효할 만큼 정치인과 유권자는 서로 손이 닿는 거리의 대면 소통에 반응한다. 군중이 모인 집회도 마찬가지여서, 집회 참가자들은 권력자와의 물리적 거리를 좁히려고 한다.
광화문 광장이 정치적 격변기마다 중심 공간이 됐던 이유도 청와대에서 집회 소리가 들릴 만큼 가깝기 때문이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에게 국정기조 전환을 요구하며 열린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 당시, 이 대통령은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끝없이 이어진 광화문 촛불과 시위대의 함성, ‘아침이슬’ 노랫소리를 들으며 자책했다”며 광화문 집회의 효과를 인정했다.[1]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촛불 집회에서도 행진의 목적은 청와대에서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로 가는 것이었다. 광화문 광장에서 시작한 행진은 점점 청와대와 가까워져 100미터 거리인 효자치안센터 앞까지 진행됐다.[2] 청와대가 일반에 개방되면서, 광화문 광장에서 열리는 집회가 행진 없이도 청와대에서 얼마나 잘 들리는지 이제 누구나 알게 됐다.
이번 탄핵안 의결 과정에서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집회가 국회의원들에게 영향을 미쳤는지는 언론이 빠뜨리지 않는 질문이었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2차 탄핵소추안이 본회의를 통과된 이유에 대해 “(1차 탄핵안이 부결된) 7일부터 14일까지 정말 많은 국민들이 국회 앞으로 와서 매일 집회를 했다”는 점을 들었다.[3] 자신도 “(14일) 국회의원회관 옥상에서 어디가 끝인지도 모를 인산인해를 지켜봤다”면서 “저 힘이 결국은 국회의원들이 다 들어와서 표결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시민이 원하는 정치 공간은 비상 상황에 목소리를 전할 수 있을 만큼 권력과 충분히 가까운 곳이다. 광장에서 집합행동이 이끌어 낸 변화는 시민에게 정치적 효능감을 준다.
여의도에 이어 광장이 펼쳐진 곳은 광화문 광장이다. 광화문을 선점한 건 탄핵 반대 쪽이었다. 전광훈 목사가 이끄는 사랑제일교회 측은 계엄 이전부터 광화문 세종대로에서 주말연합예배를 정기적으로 진행했는데, 그가 주도하는 자유통일당은 계엄 선포 다음 날부터 이를 범보수 연합 집회로 전환했다.
탄핵 찬성 쪽은 국회가 윤 대통령 탄핵안을 헌법재판소로 넘긴 다음부터 토요일마다 안국역과 광화문 광장 일대에서 ‘범시민대행진’을 개최했다. 그리고 윤 대통령이 구속이 취소되어 석방되자, 그날부터 광화문 광장에서 매일 집회를 열고 있다.
그런데 이제 청와대에는 대통령의 집무실과 관저가 없다. 다시 말해 시민들이 광화문 광장에 모이는 이유는 권력과 가까운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니다. 광화문 광장이 한국을 대표하는 정치 광장이라는 상징성 때문이다.
광화문 광장은 서울 역사도심의 중앙에 위치한 데다, 조선시대 이후 근현대사의 변곡점마다 시민 항쟁이 벌어진 장소다. 역사성이 강한 광장에서 집회를 연다는 것은 시민이 나서 민주주의를 회복시켰다는 공동체의 역사와 정통성을 계승하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나아가 자신들의 주장이 특정한 이해 집단이나 세력의 요구가 아니라 ‘국민의 명령’이라는 위상을 갖고자 하는 인정투쟁으로 볼 수 있다.
주목할 점은 보수 세력이 광화문 광장의 상징성을 전유하려는 새로운 양상을 보인다는 점이다. 2016년 탄핵 정국 당시 태극기 집회는 서울역 광장과 서울광장에서 고립적이고 폐쇄적으로 진행됐다.[4] 그런데 보수 세력은 이번 계엄 시국에서 전국의 광장에 적극 진출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3.1절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집회는 탄핵 찬반 세력의 대결 양상을 보였다. 탄핵 찬성 쪽은 안국역에서 정부서울청사까지 광화문 광장의 북쪽에서 집회를 열었고, 탄핵 반대 쪽은 세종대로와 광화문 광장 남쪽에서 집회를 진행했다. 이날 집회는 양측 모두 전국 단위 집회로 열리면서, 이들이 타고 온 대절 버스가 종로 일대 골목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이날 보수 세력의 집회에서 인상 깊었던 건 “윤석열 만세!”라는 구호였다. 대통령 관저가 더 이상 청와대가 아니고 당시 윤 대통령이 의왕 서울구치소에 수감 상태였던 걸 고려하면, 그 구호가 목표한 수신자는 윤 대통령 측이 아니었다. 그보다 그 구호의 의미는 한국 정치 공간의 중심에 그들이 진출했다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이런 양상은 정치적 의미가 깊은 광장마다 벌어지고 있다. 여의도는 44년 만의 비상계엄 시국에서 시민들이 국회를 지켜내며 새로운 정치적 의미를 지닌 공간이 되었다. 그런데 국회의 탄핵 소추 의결로 여의도에서 집회가 중단되자, 보수 성향 기독교 단체인 세이브코리아는 여의도에서 국가비상기도회 형식의 집회를 탄핵 심판이 본격화된 2025년 1월 11일부터 매주 개최하고 있다. 국회가 열리지 않는 주말에 열리는 이 집회는 국회의원들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상징 공간에서 펼치는 여론전의 성격이다.
이들은 2월 15일에는 옛 전남도청 앞 5.18 민주광장에 집회를 신고하면서 논쟁에 불을 붙이기도 했다.[4] 광주 5.18 광장과 금남로는 쿠데타에 맞선 시민들이 피를 흘린 민주화의 성지로 꼽힌다. 이곳에 계엄 찬성 측의 집회가 추진되면서 광장을 이용할 자격과 권리에 대해 논란이 벌어졌다.
전국 대학가도 ‘자유수호대학연대’가 탄핵 반대 집회를 잇따라 개최하면서, 앞서 탄핵 촉구 시국선언을 발표한 기존 학생 조직과 충돌하고 있다. 가두시위가 금지된 유신 시절 대학가는 학내 민주화 운동이 펼쳐진 공간으로 역사적으로 광장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정리하면, 정치적 격변기에 시민이 결집하는 도시 공간은 시민 항쟁의 역사가 있는 광장이다. 이들 광장의 상징성은 진보 세력이 주도한 촛불 집회 등으로 형성되었는데, 계엄 시국 보수 세력이 주요 정치 공간에 진출하며 광장의 상징성을 전유하려는 새로운 현상이 전개되고 있다.
*참고문헌
[1] 연합뉴스, 이 대통령, 특별기자회견 전문, 2008년 6월 19일.
[2] 경향신문, 청와대 100m 앞 행진 첫 허용… 오후 6시 ‘촛불의 선전포고’, 2016년 12월 2일 자.
[3] MBC, 손석희의 질문들-국회의장 우원식, 2025년 2월 4일.
[4] 황진태·박배균 2018, “2016년 촛불집회시위의 공간성에 관한 고찰”, 공간과 사회, 28권 3호.
[5] 한국일보, “우리가 5.18 계승” 광주 금남로 거리 메운 윤 탄핵 찬반집회, 2025년 2월 15일 자.
이 글은 도시관측 챌린지 100 활동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