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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의 삶공부 Apr 03. 2022

사춘기, 넌 도대체 뭐니?

교직 생활을 통틀어 가장 마음 아픈 제자로 기억되는 아이가 있어요.

6학년 담임할 때 만난 제자입니다. 공부도 제일 잘했고 감정도 풍부하고 섬세해서 아이들과도 잘 어울리는 한마디로 가장 멋진 아이라고 생각되는 아이, 정말 잘 자랄 것 같다는 생각을 100% 하게 되는 그런 제자였습니다. 에너지도 많고 끼도 많아서 장기 자랑하면 언제나 전체 앞에 나가서 춤도 잘 추고 그런 아이였어요.


“선생님, 00 이가 이상해졌어요.”

중학교 올라간 후 들려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아이가 그럴 리가 없는데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소문은 갈수록 더 안 좋은 쪽으로 들려왔습니다. 이상한 친구들과 어울려요. 공부는 아예 안 해요. 인생 포기한 아이 같아요.







이런 소식이 들렸을 때 지금 같아서는 그 엄마를 한 번 만나보려고 했을 거예요. 그 제자라도 한 번 만나 보았을 겁니다. 교직생활 시작한 지 4년 정도 때 만난 제자이니 저도 어떻게 엄두가 안 났던 것 같습니다. 가슴 한 켠만 아렸고 안타깝게 생각되었던 제자에게서 고등학교 무렵인가 연락이 왔습니다.


그때 만난 제자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외모가 많이 변했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조울증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현실 상황과 잘 맞지 않는 말을 하기도 하고....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는 제자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왜 그때도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려고 하지 못했을까요? 그게 너무 후회됩니다.


“선생님, 저 꼭 의사가 되어서 선생님 이빨 모두 책임질 거예요.”

이 말을 할 때는 눈빛이 반짝이더라고요. 꼭 의사가 되어서 그렇게 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되고도 남는 멋진 아이가 너라는 것을 몇 번이고 말해 주었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그렇게 되고도 남을 아이였으니까요. 그렇게 몇 번 아이를 더 만나면서 엄마와도 소식이 닿았습니다. 


“선생님, 제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만나자마자 대성통곡을 하더라고요. 자초지종을 말하더라고요.





이 아이는 부모님에겐 희망이었던 겁니다. 특히 아빠의 못다 이룬 꿈을 이뤄 주었으면 하는 강렬한 바람이 있었답니다. 아빠가 고시 공부를 하다가 실패를 했다고 하네요. 이 아이가 의사든 변호사든 꼭 되었으면 하는 욕심이 있었던 거고요. 중학교 가서는 아이 공부하는 것에 더 신경이 곤두섰다는 겁니다. 부모님 두 분 다요.


초등학교 때는 안 시켜도 곧잘 하던 아이가 중학교 가더니 슬 슬 공부를 등한시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한 마음이 올라오더랍니다.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게 되고 간섭하게 되고 그러니 당연히 부모와의 트러블이 생기기 시작하더랍니다.
 

“아들아. 시험 기간인데 TV만 보고 있어서 되나?”

“아,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요.”


사실 흔히 있을 법한 갈등이잖아요. 이런 말 정도는 충분히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이런 말을 아들에게서 처음 들었을 때 “허걱!”하는 심정이 더랍니다. 착하고 말 잘 듣던 아들이 그러니까 아들의 이런 반응에 놀랐답니다. 

‘이것 봐라. 큰일 났다. 어떻게 하면 좋지? 대강 다뤄서는 안 되겠는데....’

고민이 엄청 되더랍니다. 내린 결정이 충격요법(기선제압?)이었습니다. 에너지가 많은 아이니까 대강 해서는 행동이 바뀌지 않을 거라는 것이 느껴지더랍니다. 그래도 엄마 말은 잘 듣던 아이니까 엄마 많이 위하던 아이니까 이런 행동을 하면 되겠다 생각되었답니다.


아이가 또 그런 행동과 말로 반항을 할 때 아이 앞에서 바로 엄마가 쓰러져 버렸답니다. 아이가 충격받고 행동 고치라고 그런 행동을 한 건데, 아이가 정말 너무 충격을 받아 버렸다는 겁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엄마에게 이렇게 큰 상처를 주니까 이러면 안 되니까, 엄마에게 반항을 하면 엄마가 또 쓰러질지도 모르니까 이제 엄마에게 반항을 하지 못하는 게 된 거지요.


아이가 서서히 자신을 상처 내기 시작했겠지요. 자신을 갉는 게 우울증의 시작이잖아요. 에너지 센 아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세게 하는 것도, 자신에게 못 대게 구는 것도 같은 에너지로 작용하거든요. 자신을 얼마나 많이 미워했겠어요. 아이가 서서히 우울해 지니까 엄마 입장에서는 더 이상한 거지요. 원인을 모르겠으니까 나쁜 친구들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면서 전학을 시켜버렸답니다. 아이 의견도 안 들어보고, 아이 허락도 안 받고. 아이가 좋아졌을까요? 근본 원인이 친구가 아닌데......


전학을 하고는 아이가 더 이상해지니까 엄마는 더 헷갈리는 거지요. 아이의 우울이 더 심해지니까 어디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점을 보러 갔답니다. 이름이 이상해서 그렇다고, 이름을 바꾸면 된다고 했답니다. 이제 이름을 바꿔 버렸습니다. 아이가 괜찮아졌을까요? 아이의 정체성에 얼마나 큰 혼란이 왔을까요? 아이의 상황은 갈수록 안 좋아졌습니다. 


이 제자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가 왜 가장 가슴 아픈 제자라고 말할까요? 자신을 학대한 그 시간만큼 오래 동굴에서 나오지 못했으니까요. 정말 다행스럽게도 늦은 나이에 자신을 챙기기 시작해서 그 깊고 깊은 동굴에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빠져나오고 있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그것도 엄마가 뭘 잘못했는지 알아차리고 아이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돕기 시작하고 나서의 일입니다. 에너지 많은 아이였으니 원래의 에너지 많던 6학년 그때의 그런 모습으로 다시 일어서길 간절히 기도하고 응원해 봅니다. 




부모도 몰라서 그런 거잖아요.


내 자식 너무 사랑하니까 정말 잘 키우고 싶어서 고민 고민하면서 내린 결정이 그것이었을 겁니다. 내 자식 우울증 환자로 치닫도록 하고 싶은 부모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그 부모는 속이 속이었을까요. 새까맣게 탔을 겁니다. 자식만 아니면 세상 다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들었을 겁니다. 자식 때문에 우울하기를 선택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도 내 자식 끝까지 살려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버티고 살아왔을 겁니다.  


엄마로 처음 살아봐서도 힘들었는데, 사춘기는 완전 다른 상황을 만나는 거잖아요. 부모 입장에서 보면 비상사태나 마찬가지잖아요. 불안하고 걱정되고 아슬아슬 줄타기인 것 같은데, 어떻게 이걸 헤쳐 나가야 할지 모르겠잖아요. 살면서 이런 위급상황이 어디 있을까요.


‘김일성도 무서워한다는 중2병’

‘질풍노도의 시기’

‘조폭과 수도승을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

‘부모가 아이 따라 지하 13층으로 내려가야 하는 시기’

‘변덕이 죽 끓듯....’

사춘기를 수식하는 말들이 대부분 이렇습니다. 모두가 무섭고 두렵고 겁주는 단어들이 대부분입니다. 정말 그런 시기가 사춘기일까요?


‘사춘기는 신이 주신 두 번째 기회다.‘

‘사춘기는 성장의 골든타임이다.‘

‘사춘기는 부모도 아이도 함께 퀀턴점프하는 기간이다.‘

‘사춘기 때 잘해야 진짜 부모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저는 두 번째 말이 훨씬 더 맞다고 생각합니다. 앞의 첫 번째 원인을 잘 알고 대처를 하면 뒤의 시기처럼 보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앞의 원인을 모르고 무지한 채 아이를 대하면 아이도 엄마도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치닫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부모 교육하면서 사춘기 자녀와의 경험을 이야기할 때 정말 아슬아슬하고 안타까운 사례들을 많이 접하니까요.



너무 걱정 말아요.


사춘기 그것도 알면 또 별것 아닌 거더라고요. 어떻게 대처하는지 조금만 알면 부모가 할 일도 보이니까요. 내 자식 위해 용기 내어 또 정성이 쏟아지는 거니까요. 부모의 정성은 내 자식이 더 빨리 알아차리고 반응을 보이니까요.





부모도 아이도 사춘기 함께 겪어내는 것 처음입니다. 


아이는 얼마나 당황스럽겠어요. 부모에게 반항해 놓고 자기 방에 들어가서 얼마나 자신을 원망할까요. 엄마에게 반항한 게 자신을 원망하는 에너지로 사용하지 않게 부모가 도와주자고요. 사춘기에 대하여 공부해 가면서 내 자식 손 놓아 버리지 말고 함께 건너가 보자고요. 사춘기라는 이 터널을 빠져나가 보자고요. 이 다리 건너가면 성장, 행복이라는 또 다른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이 다리 잘 건너는 것, 이 터널 잘 빠져나가는 것, 자식 키우면서 이보다 더 어려운 난간은 없으니까 해 보자고요. 사춘기 때 정성 들인 그 내공으로 내 지식도 부모도 잘 살아지니까요. 사춘기 때 얻은 성장, 행복이라는 동력으로 평생 자식이랑 좋은 관계로 잘 살아지니까요.








다시 엄마로 돌아가라면 저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내 딸의 사춘기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머리 지끈지끈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내 결정이 맞나 밤새 고민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내 지식 위해서 사춘기에 대하여도 더 열심히 공부하고 싶으니까요. 실천해 보는 것도 더 정성 다해서 해 보고 싶으니까요. 힘든 것 100% 예상되지만 기꺼이 사춘기 엄마이길 자처하렵니다. 나의 성장도 100% 보장되는 시기니까요. 내 자식이 잘 되는 건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내 자식에게 가장 정성 들일 시기, 사춘기 몇 년(2~3년) 정성 들이는 것 이것 어디 못해내겠어요. 모르면 불안하고 무섭고 두렵지만 공부하면 ‘이거였어?’ 이럴 겁니다. 제가 알게 된 것 좀 더 알려드릴게요. 어머님들도 공부하실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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