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읽는인간 Sep 08. 2019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

결혼은 했지만 사랑이 서툰 너와 나에게


#1

서로 사랑하는 사자와 황소가 있었다.


둘은 처음 본 순간부터 상대에게 빠져들었다. 사자와 황소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둘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을 상대에게 선물하고자 했다. 사자는 갓 잡은 새끼 영양을, 황소는 잘 마른 여린 여물을 가지고 왔다. 사자는 황소의 여물을 먹지는 못했지만 그 마음이 고마워 억지로라도 먹어보려 했다. 황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고 황소는 자신이 영양을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사자 또한 그러했다. 처음에는 고맙다며 받아두었던 마음도 이내 거추장스럽고 불편하기까지 했다. 어느 날 사자가 말했다. [왜 나에게 아무 쓸모도 없고 맛도 없는 여물 따위를 주느냐]고. 그러자 황소가 말했다. [나 역시 피 흘리는 어린 영양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난다]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사자와 황소는 서로를 깊이 사랑했지만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내가 주고 싶은 사랑이 아니라 그가 받고 싶은 사랑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2

그는 좋아하는 것이 명확하다.


라멘, 맥주, 프로레슬링.

기본 구성은 이 세 가지.


처음 그를 알게 된 건 2007년 봄.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가 나를 발견했고, 한국인이라는 걸 알게 된 그가 꺼낸 첫마디가 [매운 라멘 어때?]였다. 이 남자, 여자를 꼬드기는 데에도 라멘을 사용하다니. 그로서는 아마 필살기였을 것이다. 그 기술에 걸려들어 이제는 나도 주말이 되면 라멘이 먹고 싶어 진다.


데이트를 약속하고, 결혼을 약속하고, 우리가 함께해온 10년 동안 늘 함께 있었던 것이 또 하나 있다. 와인에 촛불이 아니라 맥주에 감자칩. 어느 날은 좋아하는 맥주를 실컷 먹어보자며 독일로 원정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독일 맥주 원정 여행 중, 마인강에서 아침 산책

그의 마지막 구성 요소인 프로레슬링.


이것만큼은 10년이 지나도 적응이 되질 않는다. 엎어치고 메치고 하는 게 뭐가 재미있다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처음에는 예의상 조금 같이 보려고도 했다가 내 길이 아니다 싶어 일찌감치 접은 뒤로 그가 프로레슬링을 시청하면 옆 방에서 책을 읽기로 했다. 좋아하는 것이 명확한 그에 비해, 딱히 좋아하는 게 없는 나의 유일한 취미가 책을 읽는 것이기 때문이다.




#3

라멘과 맥주와 프로레슬링으로 구성된 이 남자도 평소에는 일을 한다. 웹 기획 전략실이라는 부서라고 하는데, 얘기를 들어보면 웹이랑 관련된 잡다한 모든 일을 하는 것 같다. 나도 마침 올해부터 본사의 마케팅팀에 합류하게 되어 온라인 마케팅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고 있었다. 홈페이지 운영과 기획에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을 것 같아 집에 돌아오면 맥주와 함께 이것저것 물어보는 일이 많아졌다.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던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책상 위에 못 보던 두 권의 책이 놓여있었다.


[작은 회사의 마케팅 교과서]

[작은 회사의 브랜드 교과서]


그 남자의 사랑법




#4

사자는 황소를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다음 날, 사자는 황소가 좋아하는 여물이 가득 담긴 통을 선물했다. 그러자 황소도 자신을 사랑하는 사자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서로에 대해자기중심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었는지, 자기만의 방법을 고집해 왔는지, 사랑에 있어서 얼마나 어리숙하고 미숙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5

이제 내가 프로레슬링을 볼 차례인가.


아무리 그래도 엎어치고 메치는 걸 보고, 즐기는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안하지만, 오늘부터 결혼반지는 빼고 살게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