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사람, 사람들
어떤 만남은 오래 묵혀 발효된 쿰쿰함이 맛인가 하면, 어떤 만남은 겉만 절여 아삭하게 먹는 게 제 맛인 풋풋함이 있는 법이다.
고슴도치인 나에게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오래 보고 천천히 다가가는 구수한 만남을 선호한다. ‘에이, 설마 니가?’라고 생각하신 분들을 위해 조금 더 긴 변(弁)을 덧붙이자면, 겉 보기엔 말이 먼저 나가도 마음까지 뒤따라 가기엔 꽤 오래 시간이 필요해 심지어 먹는 것, 입는 것조차도 새롭고 신선한 것은 주저하게 되는데 … (정말입니다!)
그런데 이건 어떨까.
겉절이의 아삭함과 푹 익은 묵은지의 쿰쿰함이 동시에 나는 만남이라면!
‘에이~ 그런 게 어딨어’라고 의심하시는 분들을 위해 한 번 더 변명을 하자면, 있다니까요 그런 게. 진짜로요!
우리의 첫 만남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어딘가에 있을 서버 상이 었다. 이름하야 목소리로 전 세계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 클럽하우스. 우후죽순 생겨난 그곳에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을 목소리로 먼저 만났다. 현생과 클생을 넘나들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꺼내지 못했던 묵은 이야기들을 와르르 쏟아냈다. 깜깜하고 차가운 그 서버 위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서로의 마음을 도닥이고 어루만졌다. 전선을 타고 뜨끈한 피가 통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웃고 울었다. 재롱을 떨고 끼를 부렸다. 눈앞에 있었다면 못 했을 그런 일들을 마음껏 펼쳤다. 진지하게 공부도 하고, 가볍게 수다를 떨기도 하기를 8개월 남짓. 무수한 별들과 함께 우리는 거의 모든 밤을 함께 보냈다. 한 모금 거리지만 쓰디쓴 에스프레소 더블 샷 같이, 짧지만 농후한 시간이었다.
이제는 척하면 척, 숨소리만 들어도 아프고 피곤한지, 지금 쯤 졸음이 쏟아지는지 일어날 시간인지를 안다. 마음이 아픈지, 들떠 있는지, 고민이 있는지, 소리치고 싶은지, 나보다 나를 더 안다면 거짓말이려나. 이런 걸 두고 묵은지가 아니라면 뭐라고 할까.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얼굴을 모른다.
그런 우리가 설레는 첫 만남을 갖기로 했다.
햇살은 쏟아지고 발걸음은 가벼운 파아란 가을에.
눈 뜨자마자 새벽 공기를 뚫고 한 달음에 공항으로 향하는 마음, 같은 시각 아이를 둘러업고 발걸음을 재촉하며 마중하는 마음, 밤새 풍선을 불고 한 손엔 꽃다발을 품은 채 좀처럼 잠들지 못한 마음. 이 사람 저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 밤새 짐을 싸고 풀기를 반복하는 마음과 종종걸음으로 보채는 아이를 달래 가며 뛰어가는 마음. 반가운 얼굴을 맞이할 생각에 한 땀 한 땀 정성을 기울여 손을 움직이는 마음. 먹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발품을 팔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렸을 마음. 그리고 비록 함께하진 못해도 마음만은 두겠다며 바다 건너 한 가득 사랑을 실어 보낸 마음. 그 모든 마음이 한 자리에 모였다. 기다린 시간에 비하면 너무나도 짧은 1박 2일이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모습이 마치 종이 인형이 몸을 일으켜 말을 하고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실재했으나 실재하지 않았던, 그러나 정말 있었던 나의 사람들. 이 아삭하고 신선한 만남을 어찌 겉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육아 동지이자 일본인 ‘남의 편’과 바다 건너 타국에서 나만큼이나 지지고 볶는 삶을 살고 있는 언니 동생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니 든든한 아군이 생긴것 같다. 한마디라도 더 나누고 싶어 잠을 쪼개고, 조금이라도 더 오래 기억하고 싶어 셔터를 누른다. 웃고 떠든다. 재롱을 떨고 끼를 부린다. 이제는 눈을 맞추고, 얼굴을 맞대어가며. 그렇게 살아 숨 쉬며, 우리는 여전히 밤을 함께한다.
잠에서 깨면 꿈이 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또 만날 거니까.
묵은지의 쿰쿰함과
겉절이의 아삭함을
오래오래 유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