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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는인간 Nov 16. 2021

겉절이의 아삭함 같은, 묵은지의 쿰쿰함 같은 만남

내가 만난 사람, 사람들

어떤 만남은 오래 묵혀 발효된 쿰쿰함이 맛인가 하면, 어떤 만남은 겉만 절여 아삭하게 먹는 게 제 맛인 풋풋함이 있는 법이다.


고슴도치인 나에게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오래 보고 천천히 다가가는 구수한 만남을 선호한다. ‘에이, 설마 니가?’라고 생각하신 분들을 위해 조금 더 긴 변(弁)을 덧붙이자면, 겉 보기엔 말이 먼저 나가도 마음까지 뒤따라 가기엔 꽤 오래 시간이 필요해 심지어 먹는 것, 입는 것조차도 새롭고 신선한 것은 주저하게 되는데 … (정말입니다!)


그런데 이건 어떨까.

겉절이의 아삭함과 푹 익은 묵은지의 쿰쿰함이 동시에 나는 만남이라면!


‘에이~ 그런 게 어딨어’라고 의심하시는 분들을 위해 한 번 더 변명을 하자면, 있다니까요 그런 게. 진짜로요!



우리의 첫 만남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어딘가에 있을 서버 상이 었다. 이름하야 목소리로 전 세계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 클럽하우스. 우후죽순 생겨난 그곳에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을 목소리로 먼저 만났다. 현생과 클생을 넘나들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꺼내지 못했던 묵은 이야기들을 와르르 쏟아냈다. 깜깜하고 차가운 그 서버 위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서로의 마음을 도닥이고 어루만졌다. 전선을 타고 뜨끈한 피가 통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웃고 울었다. 재롱을 떨고 끼를 부렸다. 눈앞에 있었다면 못 했을 그런 일들을 마음껏 펼쳤다. 진지하게 공부도 하고, 가볍게 수다를 떨기도 하기를 8개월 남짓. 무수한 별들과 함께 우리는 거의 모든 밤을 함께 보냈다. 한 모금 거리지만 쓰디쓴 에스프레소 더블 샷 같이, 짧지만 농후한 시간이었다.


이제는 척하면 척, 숨소리만 들어도 아프고 피곤한지, 지금 쯤 졸음이 쏟아지는지 일어날 시간인지를 안다. 마음이 아픈지, 들떠 있는지, 고민이 있는지, 소리치고 싶은지, 나보다 나를 더 안다면 거짓말이려나. 이런 걸 두고 묵은지가 아니라면 뭐라고 할까.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얼굴을 모른다.


그런 우리가 설레는 첫 만남을 갖기로 했다.

햇살은 쏟아지고 발걸음은 가벼운 파아란 가을에.


눈 뜨자마자 새벽 공기를 뚫고 한 달음에 공항으로 향하는 마음, 같은 시각 아이를 둘러업고 발걸음을 재촉하며 마중하는 마음, 밤새 풍선을 불고 한 손엔 꽃다발을 품은 채 좀처럼 잠들지 못한 마음. 이 사람 저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 밤새 짐을 싸고 풀기를 반복하는 마음과 종종걸음으로 보채는 아이를 달래 가며 뛰어가는 마음. 반가운 얼굴을 맞이할 생각에 한 땀 한 땀 정성을 기울여 손을 움직이는 마음. 먹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발품을 팔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렸을 마음. 그리고 비록 함께하진 못해도 마음만은 두겠다며 바다 건너 한 가득 사랑을 실어 보낸 마음. 그 모든 마음이 한 자리에 모였다. 기다린 시간에 비하면 너무나도 짧은 1박 2일이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모습이 마치 종이 인형이 몸을 일으켜 말을 하고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실재했으나 실재하지 않았던, 그러나 정말 있었던 나의 사람들. 이 아삭하고 신선한 만남을 어찌 겉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육아 동지이자 일본인 ‘남의  바다 건너 타국에서 나만큼이나 지지고 볶는 삶을 살고 있는 언니 동생들을  자리에서 만나니 든든한 아군이 생긴것 같다. 한마디라도  나누고 싶어 잠을 쪼개고, 조금이라도  오래 기억하고 싶어 셔터를 누른다. 웃고 떠든다. 재롱을 떨고 끼를 부린다. 이제는 눈을 맞추고, 얼굴을 맞대어가며. 그렇게 살아  쉬며, 우리는 여전히 밤을 함께한다.


잠에서 깨면 꿈이 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또 만날 거니까.


묵은지의 쿰쿰함과

겉절이의 아삭함을

오래오래 유지하면서.


진한 여운이 남았던 하네다 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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