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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는인간 Dec 01. 2021

글에 귀천을 따지지 말라

#ep.2 글을 시작할 수 있는 방법

함께 쓰는 글쓰기 매거진 <글쓰기를 글쓰기>의 두 번째 주제는 ‘글을 시작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정했다.  

2주의 기간이 주어졌고 이제 쓰면 되는데 영 글이 시작 되질 않는다.  


글 한 편 쓰기까지 엉덩이가 굼뜬 나에게 ‘글을 시작하는’ 일은 늘 숙제다. 나도 못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방법이 있다면 먼저 나부터 알고 싶다.  


마감 기한이 다 되었지만 거짓말은 할 수 없어, 글을 쓰고 싶지만 시작할 수 없는 이 땅의 수많은 글쓰기 지망생을 대표하여 ‘이런 나도 글을 시작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을 공유해보려 한다. (원래 성공담보다는 실패담이 더 재밌는 법이니까.)




쓰지 않고 써지는 글은 없다 

이 당연한 말을 내 것으로 만들기까지 무진장 많은 시간이 걸렸다. 매일 써라, 일정량을 써라, 꾸준히 써라. 많은 글쓰기 책에서 입을 모아 말하는 불문율을 굳이 외면하고, 나는 쓰는 대신 핑곗거리를 찾았다.  


글이 써지지 않는 병에는 많은 증상들이 있지만 나의 경우는 완벽한 글을 기다리다 완벽하게 글을 쓰지 못하는 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제목이 정해지지 않아서, 무엇을 써야 할지 구성이 그려지지 않아서, 어떻게 결론을 내야 할지 몰라서... 분명 머릿속엔 써야 하는데, 쓰고 싶은데, 하는 막연함과 초조함이 틈만 나면 스쳐지나갔지만 그걸 글로 쓰자니 시간도 있어야겠고, 생각은 더 해야겠고, 더 좋은 표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에 첫 줄을 시작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다 글이 꽉 막혀버리는 만성 변비 현상도 여러 번 겪었다. 쓰던 블로그를 개점폐업 상태로 만들기 일쑤였고, 좋아서, 신나게 시작한 인스타그램 같은 SNS도 글이 써지지 않을 때면 시들 … 해져 쳐다보기도 싫어졌다. 그럴 때면 왜 글은 쓰겠다고 해서 사서 고생을 하나 … 싶은 마음이 불쑥 튀어나왔다. 보여주기 위함이라면 사진 한 장만으로도 충분한데, 허투루 하고 싶지 않은 마음. 잘해보겠다는 마음. 되려 그게 나를 짓눌렀다.


사실, 안 쓰고 살아도 된다  

글을 써야 하는 이유가 한 가지라면 글을 쓰지 말아야 할 이유는 백 여덟 가지다.... 배고파서, 힘들어서, 졸려서, 바쁘니까, 막혀서, 우울해서, 약속 있어서, 막막해서, 하루 남았으니까... 『쓰기의 말들』 -은유

까짓 거. 안 쓰면 되지. 누가 쫓아오길 해 잡아먹길 해. 전업작가라면야 어떻게든 써야 한다지만 내 글을 기다리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나 밖에 없다. 그럼 안 기다리고 안 쓰면 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마음이 또 그렇게 먹어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쓰는 인간이 되고 싶은 욕구가 남아있다. 대단한 글도 아니지만 가끔씩 들춰보는 과거의 메모, 과거의 문장들에서 나는 참 위로를 많이 받았다. 그때의 내가 이런 생각을 했구나 기특하기도 하고, 이만큼 할 수 있었다면 지금의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은 용기와 위안을 얻기도 하고.  


그렇다고 과거의 나를 계속 우려먹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니 지금의 자리에서 나중의 나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발자국을 남겨주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밑천이 동나기 전에.


글에 귀천을 따지지 말라  

운 좋게도 그동안 좋은 책과 글만 만난 탓인지 무릇 글이란 거창한 결론 하나쯤은 내야 쓸 수 있는 거라 생각했다. 내 눈엔 너무나 '완벽한' 그런 글 앞에서 이럴 바엔 시작도 말지, 하고 쉽게 포기했던 시간들...  


그러다 문득 '메모 글쓰기'를 만나게 됐다. 백지를 하염없이 바라보면 그저 백지지만, 화선지에 먹물로 점 하나 찍으면 누가 또 아나, 그걸 예술이라고 쳐줄지. 그래, 뭐라도 한 줄 적자. 점이라도 찍자. 그런 심정으로 노트를 펼쳤다.  


어느 날은 한 문장에서 끝나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한 장 두 장 세 장이 우습게 넘어가는 날도 있었다. 많다고 다 좋은 건 아니어서 감정의 배설물 같은 글들도 많았지만 아무렴 어떤가. 글에 귀천을 따지지 말자. 길든 짧든, 어쨌든 내가 쓴 글은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이고 그게 좀 못생겼더라도 세상에 단 한 사람, 나 만큼은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사랑을 담뿍 주어야지 않겠나.  


댓글도 글이고 카톡 메시지도 글이다. 점만 찍어도 글이고 인스타그램에 올린 해시태그도 글로 쳐주자. 그거 하나 생각하느라 얼마나 품이 많이 갔나. 글에 귀천이 어딨어. 한 줄이라도 내가 썼으면 내 글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글쓰기에 대한 묵었던 체증이 숙변처럼 내려갔다.  


영감님이 친구분을 데려오신다  

그렇게 욕심을 내려 놓고 한동안 쓰지 않아 책상 서랍에 쳐 박아놓은 꽉 막힌 볼펜 똥으로 돼지꼬리나 그려보자는 심정으로 끄적이다 보니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영감님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누추한 버선발이라도 모시러 가니 얼쑤 좋다며 친구분들을 데리고 오는 격이 아닌가!  우선 한 줄을 쓰기만 하면 그 한 줄이 분명히 다음 문장을 데리고 왔다. 묵직한 글쓰기의 문을 열어젖히자 뭔일인가 구경하러 모여든 생각, 단어들이 복작거리며 어떻게든 한 문장을 완성해 주는 것이었다.  


세상에 보이지 못해도 그게 무슨 상관이람. 오늘도 나는 돼지꼬리 같은 한 줄을 적었고 지금 이 글도 2주간 짬을 내어 끄적인 생각들을 이리 끼우고 저리 맞추어 어찌어찌 완성해 가고 있다. 엉성하고 볼품없어도 어쨌든 글은 만들어졌고, 이제 마침표가 가까워지고 있다.  


10분만, 아니 5분만  

더 잔다는 소리가 아니다. 앞뒤로 칸막이를 쳐놓고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10분, 아니 5분만 글 쓸 시간을 나에게 주자. 나에겐 이 방법이 여러모로 효과가 있었다. 아이들을 챙기는 아침 시간은 너무 바쁘기에 조금 일찍 도착한 회사 데스크에서 숨을 고르고 노트에 손을 올려 오늘 날짜를 적는다. 꼭 해야 하는 일들을 선언하듯 리스트업 하고, 나머지 공간은 뭐든 적는다. 하늘이 두쪽 나도 10분만, 아니 안되면 5분만이라도. 점만 찍고 끝나더라도 이 시간을 꼭 확보해두는 것. 못난 글이라도 계속 쓰게 하는 최소한의 마지노선이다.  


시간이 많으면 더 해도 되나?  

아니, 나는 그 생각 반댈세다. 글을 쓰는 게 전부인 전업 작가라면 모를까 하루에 너무 많은 시간을 글쓰기에 할애하지는 말자.  


"내가 아주 그냥, 쓰기만 해 봐. 10분이 30분 되고 30분이 1시간 되면 진짜 더 잘 쓸 수 있는데."라는 여지를 남겨 놓기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시간으로 잡아두면 두고두고 마음이 편할 것이다.


남의 글도 글이다  

이제 슬슬 이 글도 마무리 지어야 할 시간이 다가온 것 같은 마당에, 마지막으로 치트키 하나를 소개한다. 글에 귀천을 따지지 말라는 말의 연장 선상에서, 진짜 오늘은 너무 아무것도 못 쓰겠다 하는 그런 날 안성맞춤인 방법이다. 바로 남의 글을 적는 것이다. 평소 좋아하는 책이나 글의 한 꼭지를 가져와 머리는 생각하지 말고 눈과 손으로만 필사를 한다. 펜으로 해도 좋고 컴퓨터 자판이어도 상관없다. (내 경우엔 핸드폰은 비추더라) 평소 자신이 글을 쓰는데 편안함을 느끼는 툴이라면 뭐든 상관없다. 어떻게든 그 시간 손을 놀려 오늘 하루도 글을 썼다는 착각을 내 몸에 새겨 둔다.  


일견 기계적으로 보이는 이 작업을 하면서도 분명 다음 글을 이어나갈 힌트를 발견할 것이다. 밑져야 본전. 꼭 해보시라.  


이제는 설익은   자체로도 괜찮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래 위에 파도가 덮어쓰고    파도에 없어지더라도,지금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존재했음을...

_ 읽는인간의 에세이 인간을 바꾸는  가지 방법」 중에서  




호기롭게 올렸던 브런치 첫번째 글

https://brunch.co.kr/@dailytokyo/1


안 쓴다고 누가 쫒아오는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쓰고 싶은 이유는 뭘까

https://brunch.co.kr/@dailytokyo/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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