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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Dec 07. 2021

글감은 삶 속에 있다.

어쩌다 아직 남아 있는 초등학교 때의 일기장을 펼쳐보면, 매일이 비슷한 내용이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지 않았을까.      


‘오늘은~’으로 시작한 일기는 오늘 했던 일을 나열하고, 조금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인 뒤 ‘참 즐거운 하루였다.’, ‘참 뿌듯한 하루였다.’, ‘참 속상한 하루였다,’ 정도의 느낌 문장을 쓰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어쩐지 내 일기장에는 속상한 하루였다는 문장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어린 마음에도 선생님에게 검사를 받는 일기장에 부정적인 느낌의 이야기는 쓰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 나에게는 속상할 만한 일이 별로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간에 그때의 일기장에는 즐거웠던 일, 행복했던 일, 기뻤던 일이 대부분이었는데, 초등학생이 매일 다르게 쓸만한 기쁘고 즐거운 일이 뭐가 있었겠는가. 매일이 그저 그런 일들의 나열이었고, 덕분에 일기 쓰기는 숙제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성인이 되어 집에서 독립한 후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신기할 정도로 아프고 슬픈 일들이 자주 일기장에 등장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내밀한 일들을 길든 짧든 글로 써 내려갔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글쓰기는 자기 치유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담아두었을 때는 끝을 모르고 부풀기만 하던 걱정과 두려움이 단어로 문장으로 토해내는 순간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겁이 난다고, 자신이 없다고 쓰다가도 끝에 가서는 그래도 한 번 더 해보자고, 지금껏 잘해오지 않았냐고 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돌이켜보면 나의 글은 일기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경험하지 않은 것들은 글감이 될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아리고 쓰린 경험이 자주 등장한 것은, 글이 아니고야 그런 경험들을 털어낼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들을 글로 쓸 때마다 감정의 배설 행위를 하는 기분이었고, 실제로 자주 후련함을 느꼈다. 아마도 엄마 이야기로 책을 써 내려간 것 역시 비슷한 맥락이었을 것이다.




힘들고 괴로운 일들을 글로 써내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 일들은 가능한 한 빨리 잊거나 모른 척 넘어가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니까. 문제는 잊히지도 않고, 모른 척할 수도 없는 일들이다. 털어내지도 쏟아버리지도 못한 채, 가슴속에 움켜쥐고 있는 일들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당장의 현실에 대한 불만일 수도 있고, 순탄하지 않은 연애일 수도 있다.

잡히지 않는 꿈일 수도 있고, 의미 없이 흘러가는 일상에 대한 불안일 수도 있다.

미워하는 직장 상사일 수도 있고,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배우자일 수도 있다.

너무나 행복하지만 가끔은 버거운 육아일 수도 있고, 불현듯 돌아본 지난 세월일 수도 있다.     


다채로운 단어, 매끄러운 문장 등은 뒤의 일이다. 일단 쓰고 보는 거다. 속이 후련해질 때까지 마구 쓰는 거다. 며칠 만에 화장실에 다녀온 것처럼 속이 텅 빈 듯한, 후련함을 느꼈다면 그 글감은 제 역할을 다한 것이다. 쓴 글을 당장 다시 읽어보지 않아도 좋다. 그저 글쓰기로 스스로를 위안하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 한 번은 꼭 자기의 글을(어쩌면 배설된 감정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글로 써진 감정은 나의 감정이지만 조금 낯설게 읽힐 것이다. (낯설게 읽힐 정도로 마구 써야 한다. 애써 단어를 고르지 않고, 말 그대로 마구마구.) 낯설게 읽히지 않는다면, 아직 현재 진행형인 감정 혹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덧붙여 써도 좋고, 활자화된 감정을 읽고 또 읽어도 좋다. 낯설게 읽힌다면, 감정의 배설물을 털어내고 조금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다시 써보는 것도 좋다.

  



대단한 글감을 찾으려다 보면 시작도 전에 진이 빠진다. 당장 SF작가가 되려는 것도, 인문교양서를 쓰려는 것도 아니라면 '대단한' 글감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아야 한다. 모르긴 몰라도 SF 소설을 쓰는 분들도, 인문교양서를 쓰는 분들도 글쓰기의 출발은 자신의 삶에서부터였을 것이다. 글을 쓰는 첫 번째 이유는 '나' 자신을 위해서이다. 내 안에서 가장 생생한 글감을 골라 썼을 때, 그 글은 살아있는 글이 된다. 표현이 거칠고 퇴고가 부족할지언정, 죽은 글은 아닐 수 있다.      


어쩌다 보니 나의 글쓰기는 두렵고 아픈 일들에서 출발했지만 당신의 글쓰기는 다를 수 있다.      


오늘 하루 중,

나를 미소 짓게 한 일

벅차오르게 행복했던 때

문득 생각난 인연

고마운 사람

나를 기쁘게 한 존재

나를 옭아매는 일

도망치고 싶은 기억

펑펑 울고 싶던 순간

자꾸만 생각나는,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

오늘 같은 날씨에 불현듯 그리워지는 곳

돌아가고 싶은 시간      


스스로 느끼고 경험한 일, 혹은 마음에 오래 담아둔 어떤 일도 글감이 될 수 있다. 단, 거창하고 멋진 글을 쓰려는 ‘욕심’을 내려놓을 때, 그 글감은 글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써낸 글은 적어도 자신에게는 좋은 글일 것이다.      


글쓰기는 결코 거창한 일이 아니다. 누구나 할 수 있고, 당장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산다는 건 경험한다는 것이고, 경험했다는 건 이미 최고의 글감을 품고 있는 거니까.

              




브런치 작가 3명 (선량, 읽는인간 , 진아)이 함께 쓰는 매거진입니다. 글 쓰는 사람으로 살면서 한 번쯤은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저희 세 사람의 이야기는 각각의 물길을 타고 흐르지만, 결국은 글쓰기의 바다에서 만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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