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5. 나만의 글체 찾기
글씨의 모양이나 솜씨라는 뜻인데 필적에는 지문만큼이나 그 사람을 대변하는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실제로 발신인 불명의 협박 문서나 위조문서의 필적이 용의자의 것인가를 구별하기 위해 글씨의 형태, 필순, 필압, 자획 등을 따지는 필적 조사는 과학 수사에서도 사용하는 신빙성 있는 증거 조사다.
수년간 범죄자들의 진술서를 들여다본 모 전직 검사는 그 안에서 독특한 특징을 발견했다고 한다. 필적이 불안정하고 자간이 들쭉날쭉한 글씨는 불안정한 심리를 표출하고, 각지고 또박또박 쓴 글씨는 높은 지적 능력과 열정을, 속도가 빠르고 오른쪽으로 갈수록 위가 올라가는 경향을 보이는 글씨에서는 낙천적이고 성공 지향적인 성향을 엿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그 사람의 개성을 의미하는 스타일(Style)의 어원이 글씨, 글체에서 왔다고 하니, 편지나 문서의 말미에 적는 서명이 그 사람을 증명하는 기호(싸인)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일본어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다. 사자성어로는 書如其人(서여기인)이라고도 하는데, 서도에서 많이 쓰이는 말로 글에서 그 사람이 보인다, 글이 그 사람을 말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글체를 넘어 담겨 있는 글에서 그 사람의 성품과 생각, 행동거지와 그릇의 크기를 짐작할 정도라니. 그야말로 一点一画 (일점일획)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글씨만으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판단하기는 어렵다지만 다년간 손에 익은 필적이 바뀌는 경우는 극심한 뇌 손상, 또는 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을 경우에 한한다고 하니, 수양을 통해 필적을 바꾸려면 그에 상응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여담이지만 지민 님의 어린 왕자 필사 방에서 한 자 한 자 정성을 기울여 쓰시는 모든 분들을 머리 숙여 존경합니다.)
이 문장을 써놓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려니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 부끄럽기까지 하다. 글이라는 게 참 신기하게도 남의 것을 가져와 입어도 눈치챌 사람은 거의 없음에도 적어도 한 사람, 나 자신에게는 그렇게 어색하고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성품처럼 딱 떨어지는 옷이 없고, 또 있다 한들 굳이 굳이 내 손을 거치지 않으면 떼지 않은 태그처럼 온몸이 근질근질한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다.
학부시절, 시간에 쫓겨 쓰는 리포트라도 어디서 베껴온 것을 그대로 쓸 수 없어 내 식(?)으로 다시 고쳐 쓰다, 이럴 바엔 내가 처음부터 쓰고 말지 하며 워드 파일을 몇 번이고 뒤집어 본 경험이 다들 있지 않나.
서문이 길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문체란 글쓴이에 따라 드러나는 문장의 특성, 개성이라는데 사실 나 같은 작가 지망생에게 그런 것이 있을까, 대답이 궁색했기 때문이다. 혹시나 싶어 지금까지 내가 써온 글들을 한 두 차례 훑어보지만, 길이는 들쭉날쭉, 주제도 중구난방. 어느 것 하나 통일되게 느껴지는 ‘결’이 없어 보였다. 숨겨서 무엇하리.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내 글을 읽어주신 분들의 객관적인 의견을 들어보기로 했다. 단 한 분이라도 알려주신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생각했는데 …
담담하다. 편안한다. 따뜻하다. 사람 냄새난다. 온기가 있다. 정중하다. 담백하다. 여백이 있다. 예쁘다. 뭉클하다. 깨끗하다. 명료하다. 생각을 이끄는 힘이 있다. 읽으면 힘이 난다. 룸메이트 언니가 이층 침대에서 들려주는 이야기 같다 …
정말 이 만큼만 되었음 소원이 없겠네…! 지향하지만 가 닿지 못한 분에 넘치는 수식에, 마치 없는 살림에 가불 하는 느낌이라 어떻게 빚을 갚아나가야 할지 발을 동동 굴렀다. 덤에 덤을 얹어 주신 말씀에 조금이라도 다가가기 위해, 계속 쓰는 수 밖엔 방도가 없겠다 싶다. 너무나도 부끄럽고 창피하지만, 피드백을 펼쳐 놓고 보니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청사진이 보였다. (현재 그러한지는 차치하더라도)
1. 사람 냄새난다, 온기가 있다
‘긴 글은 잘 안 읽는데 당신의 글은 끝까지 읽게 됩니다.’ 어느 날 인스타그램에서 알게 된 지인분이 남겨주신 댓글이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나는 이 말을 꽤 오랫동안 품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느끼셨을까. 왜 그렇게 생각해 주셨을까… 그분의 감정을 다 헤아릴 순 없지만 그날 이후, 문장을 쓸 때 특히 이 말을 자주 떠올렸다.
지금에 와 생각해 보니, 아마 그건 내 글이 다루는 주제가 그러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 코가 석자인 나는 책을 읽을 때도 우주와 미래를 다루는 SF 장르는 쳐다볼 엄두도 내지 않는다. 내가 쓴 글의 대부분은 반경 5미터 이내의 이야기가 전부다. 처한 상황은 달라도, 하루하루, 일상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들은 그만저만 비슷하지 않을까. 그러기에 나의 하루가 어느 날 있었던 당신의 하루일 수도 있고, 곧 일어날 내일의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닌지. 명필도 아니오 명문도 아닌 내 문장에 귀 기울여 주심은 비슷비슷한 너와 나 사이의 근심 걱정에 공감의 마음이 덧대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2. 담담하고 편안하다
어떤 작가들은 피아니스트가 건반 위에 손을 얹듯, 키보드에 손을 올리면 재즈 선율처럼 즉흥적으로 글이 술술술 써진다는데 지난 글에서도 밝혔듯 내 손가락에선 선율은커녕 먼지 한 톨도 나오지 않으니 범인(凡人)은 범인 대로 나름의 방법을 찾아야 했다.
사실 나는 입으로 글을 쓴다. 주둥이만 놀린다는 뜻은 아니고, 글을 쓰면서도 그게 육성으로 나왔을 때 말이 되는가, 자연스러운가를 염두에 두려고 한다. 같은 곳을 몇 번이고 웅얼웅얼 중얼중얼하는 동안 스스로 설득되지 않고 걸리는 부분이 있으면 보드라워질 때까지 몇 번이고 대패질을 한다. 그리고 첫 문장부터 마지막 마침표까지 한 숨에 읽어 나가도 불편함이 없을 때, 글을 내보낸다.
물론 이것의 치명적인 단점은 그 때문에 글 한 편 쓰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타와 비문이 만연한 걸 보면 완벽한 글쓰기는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3. 담백하고 명료하다
뼛속까지 아날로그 인간인 나는 메모가 아닌 글쓰기를 마음먹을 경우 처음부터 백색 창에 커서를 띄우는 일은 거의 없다. 빈 종이를 꺼내 글의 처음과 끝, 전체적인 골격을 그려보고 여백 안에 단상을 끄적여 본 후에 어설프더라도 마침표가 찍히면 그제야 키보드에 손을 얹는다.
물론 이건 이성적인 글쓰기가 필요한 경우의 이야기고,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 순간이나 답답한 순간의 글쓰기에서 종이는 또 다른 역할을 한다. 무슨 말이든 쏟아붓고 싶을 정도로 감정이 주체되지 않을 때, 종이는 나의 감정을 여과 없이 받아 안아준다. 갈겨쓴 글씨로 한바탕 마음을 쏟아붓고 나면, 마치 커피 필터를 거쳐 나온 드립 커피처럼, 감정의 찌꺼기는 대부분 걸러져 나오고, 후에 한 문장 한 단락으로 글을 정돈하면서 마음도 생각도 그에 맞게 다듬어지곤 한다.
4. 비유가 많다
글쓰기를 글쓰기를 함께 하시는 진아 작가님께서 글체에 관한 나의 고민을 듣고 제일 먼저 해 주신 말이다. '정아 작가님의 글에는 비유와 묘사가 많아요'. 그런가? 그런가?... 그러네... 인정. 사실, 이건 환경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모국어가 아닌 환경에서 오래 생활하다 보니 아무래도 어휘의 부족함은 늘 느끼기 마련인데 (그래서 더 갈구하기도 한다) 부족한 어휘력 때문에 오는 불편함과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나름의 방편으로 모색하게 된 것이 '같은 말을 여러 각도에서 반복하기'였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말을 상대에게 찰떡같이 전달하고 싶지만 꼭 맞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 마치 가족오락관처럼 '그거 있잖아 그거, 크고 동그란 거. 태양 말고 노란 거. 밤에 보는데 바라보며 소원을 비는 거...' 그렇게 같은 말을 여러 번, 여러 각도에서 이야기하면서 상대방의 머리에 '아~ 보름달!'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양질변환이 일어나는 '임계점'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하는데 같은 말을 여러 번 쓸 수 없어 그때마다 다른 표현을 고민하곤 했다.
쓰지 않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해선 몸이 향해있는 각도를 트는 힘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팔씨름 같은 것이다. 넘어갈 듯 넘어갈 듯 넘어가지 않던 사람이 어느 지점을 넘으면 완전히 쓰는 사람, 아니 쓸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전향하게 하는 힘이 있다.
_ <글쓰기를 글쓰기: ep4.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힘> 중에서
책 한 권 품지 않은 인생은 없다. 누구에게나 책으로 쓸 만한 이야기 하나쯤 있다. 그러니 당신도!라고 등 떠미는 순간, 알게 모르게 차 올랐던 [쓰고 싶다]라는 욕망의 물 잔이 '찰랑'하고 넘쳐흘렀습니다.
_<인간을 바꾸는 세 가지 방법> 중에서
어느 날은 팔씨름으로, 어느 날은 물 잔의 찰랑거림으로 모양을 달리해가며 임계점이라는 것을 그려내 보려고 했다. 잘 전달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단 한 사람 내 안에는 또 하나의 선명한 이미지가 자리 잡았다.
쓰고 나니 여전히 희망사항으로 가득 찬 글이 되어 가는 것 같아 나의 문체 찾기(라고 쓰고 염원하기로 읽다)는 이쯤에서 마무리 지을까 한다. 물론 그 덕분에 조금이나마 그곳을 향해 갈 수 있는 것이니…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조금씩 어른이 되어 가고 있지만, 바라는 것이 있음이 앞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힘이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글체 만큼이나 나라는 사람도 그러했으면 좋겠다. 사람 냄새나며, 온기가 있고, 담담하고 편안하지만 담백하며 명료한. 무엇보다 서로의 마음에 같은 그림을 그려나갈 수 있는 사람.
書は人なり.
내가 글이고 글이 내가 되도록.
공동 매거진 <글쓰기를 글쓰기> 는 브런치 작가 3명 (선량/진아/읽는인간)이 함께 쓰는 매거진입니다. 이름도 생김새도 사는 곳도 다른 우리가 '글쓰기'라는 하나의 주제로 만나 각자의 생각과 경험, 방법을 나누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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