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읽는인간 Sep 28. 2020

엄마, 풀잎들도 가을 준비를 하나 봐

너와 함께 시작하는 인생 1교시

아이가 젖먹이 시절. 멀리서 울음소리만 들어도 내 자식인걸 알아채던 때가 있었다. 어른들이 으레 하시는 말씀인 줄 알았는데, 아니다. 겪어보니 진짜였다. 물론 처음부터 귀신같이 알아맞춘 것은 아니고 아이와 함께 뒤척인 수많은 밤을 보내고 난 후에야 왜 우는지, 뭣 때문에 우는지 알게 된 것인데, 육아 6년 차에 접어든 요즘은 애 키우는 짬밥만큼 귓밥도 같이 쌓였는지 아이가 하는 말을 놓치고 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엄마는 왜 내 말 안 들어줘? “

“엄마, 왜 내가 말하는데 다른 거 해? “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종일관 고저장단의 울음소리로 엄마를 호출했던 아이는 이제 자신의 불편함과 억울함을 요목조목 따져 물을 줄도 알게 되었다. 그렇지, 참... 엄마가 요즘 가는 귀가 안 좋은가 보다. 아이를 무릎에 앉히며 궁색한 변명을 대 보지만 뾰루퉁하게 나온 입술은 좀처럼 들어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엄마, 풀잎들도 가을 준비를 하나 봐!


아이와 공원에 산책을 나갔다 돌아오는 길.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는 깜빡이를 켠 순간, 내 머릿속에도 환하게 불이 켜진다.


차창 밖에 멈춰있던 가로수들이 가을 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저마다 고운 색을 갈아 입고, 가을 햇볕 받아 잘 말려진 잎사귀들이 오랫동안 함께했던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는 장면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토록 마법 같은 표현이 또 있을까. 아이의 한 마디에 세상이 달라 보이는 신비한 경험! 너의 맑고 투명한 눈에 비친 세상은 얼마나 경이롭고 아름답고 신비한 것일까.


아이는 세상을 온몸으로 이해한다.

그렇게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세상을 엄마에게 열심히 이야기해 주는데, 정작 엄마인 나는 그 목소리에 얼마나 귀 기울여 주었나. 그동안 놓치고 지나친 것들이 얼마나 더 많을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하다. 지금이라도 날 꼭 빼닮은 이 꼬마 선생님의 말을 놓치지 말고 경청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아이가 첫울음을 터뜨린 그 날부터, 아이의 인생은 수많은 시작과 처음으로 채워져 간다. 처음으로 듣고, 처음으로 보고, 첫마디를 뱉고 첫 발을 내디뎠던 순간. 처음으로 고열이 났던 겨울밤과, 작은 어깨가 유난히 더 작아 보였던 보육원 첫 등원 날. 처음으로 친구와 싸우고 마음을 다쳤던 날, 그리고 얼마 전 보육원 첫 합숙훈련까지...


그런 아이의 처음과 시작을 함께하며 나의 첫 순간들을 복기해 본다.


나는 다섯 살 이전의 기억이 없다.
하지만 민하가 태어나고 민하는 나에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를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나는 너에게 미래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미안.

『오늘의 퀴즈』 유세윤, 미메시스 (2019)

   

선명하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했을 나의 첫 순간들. 그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리며, 동시에 나의 첫 순간을 함께한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비춰보기도 한다. 그렇게 아이를 키우며 하나부터 열까지 다시 배운다. 아이와 함께하는 인생 1교시가 시작된다.


인간은 매 순간을 산다. 그건 아이도 어른도 마찬가지다.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깨어있는 것이다. 이 당연한 것을 잊고 사는 나에게 아이는 나에게 끊임없이 가르쳐준다.


매 순간 깨어 있을 것.
감탄하는 하루를 살아갈 것.  


나는 이 감정을 문장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아이는 온몸으로 이해했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 살갗에 닿은 감촉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할 줄 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아이의 생각을 놓치지 않고 귀담아 들어주는 것, 그뿐인데...


매일 똑같은 숙제를 내주는데도 그거 하나를 못해낸다.


줄탁동시(啐啄同時)다.

아이를 키우며 나도 배운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녀가 남기고 간 편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