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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는인간 Oct 30. 2020

줄곧 미뤄왔던 일

나만의 공간을 갖는 일


내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아이를 위해 책상을 구입했다.

인터넷으로 구할 수도 있었지만, 왠지 이 특별한 경험을 아이와 함께 하고 싶어 손을 잡고 가구점을 찾았다. 모양도 색깔도, 기능도 다양한 학습용 데스크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 아이는 이것저것 욕심을 내었지만, “어른이 되어도 쓸 수 있는 책상, 쓰고 싶은 책상을 고르자”라는 약속을 기억해주었고, 그렇게 고르고 고른 책상이 집으로 도착했다.

천연 목재로 만든 심플하고 깔끔한 책상. 맨들한 표면을 만질 때마다 갓 짜낸 듯한 나무의 진한 향이 올라오는 것 같다. 보육원에서 돌아와 새 책상이 도착한 것을 알고 들뜬 망아지처럼 의자 위로 뛰어오르는 아이. 하얀 도화지 같은 책상 서랍에 무엇을 넣을까 설레 하는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처음 내 책상이 생겼던 날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4~5학년 때쯤이었을까.

그 전까진 가족들이 모이는 식탁이나 앉은뱅이 탁자에서 숙제를 하곤 했는데, 어느 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멀리 파란색 트럭에서 짐을 옮기는 아저씨들이 우리 집 현관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무슨 일인가 싶어 얼른 뒤따라가 보니 내 방에 새로 온 책상을 설치하고 있었다.


다크 브라운 베이스에 자주색과 흰색이 포인트로 들어 간 널찍한 책상. 표면에는 두꺼운 유리가 깔려있고, 천장까지 닿을 듯한 책장에는 내가 좋아하는 전집이며 동화책들이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을 여유 공간이 있었다. 그 책상 위에서 공부도 하고, 어떤 때는 이불을 씌워서 나만의 아지트를 만들기도 하고, 졸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기숙사 생활, 자취 생활, 유학 생활을 거쳐 추억이 깃든 책상과 자연스럽게 이별하게 되었고, 지금은 가끔 친정에 갈 때마다 나이 터울이 있는 남동생 방에서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 중인 책상을 보며 그땐 그랬지, 하고 추억에 젖는 정도가 됐다.


결혼을 한 이후론 변변한 내 책상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웬만한 것은 그냥 다이닝 테이블 위에서 해결했고, 시부모님과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그마저도 여의치 않게 되자 유학 생활을 하면서 구입한 딱딱한 접이식 테이블을 간이로 사용하곤 했지만 필요할 때마다 접고 펼치는 식이었기에 특별히 ‘내 공간’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러다 진득하게 글이 쓰고 싶은 날이면 노트북을 옆구리에 끼고 눈칫밥 먹을 각오로 남편의 책상을 기웃거리며 소심하게 ‘지금 써도 돼?’하는 유목민 생활을 전전하고 있던 참이었다.



‘나도 내 책상이 갖고 싶다’


아이의 책상을 사야지 마음먹었을 때 즈음, 불쑥 그런 마음이 올라왔다. 아이와 나란히 앉아 엄마도 책을 읽고 아이도 공부를 하는 그런 공간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눈치 보지 않고 엄마도 책상 앞에 앉아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는 풍경이 당연한 집이라면 어떨까. 아아, 그것 참 너무 행복하겠다! 싶으면서도 한 편으론 아이들 방으로 남겨두어야 할 공간에 내 공간을 만들어 버리는 게 이기적인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동시에 들어 선뜻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던 찰나, 올여름 ‘예술하는 습관’이라는 책을 읽고 쓴 독서 노트의 말미에서 본심이 새어 나왔다...



책에는 소개된 모든 여성들이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삶을 뚫고 나온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18세기의 여성과 21세기의 여성. 일곱 아이를 키우던 여성과, 결혼하기를 거부한 여성. 노예의 삶을 산 여성과, 하인을 여럿 거느렸던 여성. 규칙적인 생활 습관과 완벽한 루틴을 고수했던 여성과, 술과 담배 때로는 약물에 기대어 창작의 고통을 달랬던 여성. 시인과 작가, 조각가와 음악가, 성악가와 무용수 등 그 활동 무대도 다양하다. 이뿐 이겠는가. 책에 미처 담지 못한 이름 모를 수많은 여성들의 서사가 있었을 것이다.

주어진 환경과 조건을 극복하며 채워온 그녀들의 하루가 쌓여 이 시대의 우리가 있고, 언젠가 우리들의 발자국이 모여 다음 세대가 수월한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발판이 되는 거라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어떤 하루를 채워나가야 하는가. 그동안 우선순위에서 밀렸던 나만의 넓은 책상을 들이는 일도 더 이상 미루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하루로 우리의 시대를 만들어 가는 모든 여성 동지들이여! 훗날 어떤 책의 어느 페이지에 기록되지 않더라도 삶을 의미 있는 기록으로 채워나갈 수 있기를! 이 독서 노트 또한 그 발버둥 중의 하나로 기억되기를!

_독서노트: 그녀들의 하루가 쌓여 『예술하는 습관』  by. 읽는 인간
https://brunch.co.kr/@dailytokyo/48




그렇게 해서 아이와 똑같은 책상을 나란히 구입했다. 물론, 지금은 배 속에 있는 둘째를 위한 것이기도 하니 이 또한 임시로 쓰는 것이긴 하지만, 적어도 5년 정도는 잠시 빌려 써도 될 것이다. 책상을 두 개 사겠다고 선언했던 날, 남편은 조금 놀란 듯 말했다. “이렇게까지 갖고 싶어 하는지 몰랐어”.


실은 나도 몰랐어. 내가 이렇게까지 갖고 싶어 했는 줄은. 그런데 꼭 필요하겠더라고. 나만의 책상. 아내가 되든, 엄마가 되든, 나의 가장 사적인 공간이 되는 곳. 그곳에서 책도 읽고 일기도 쓰고... 나의 모든 것을 꺼내보고 넣어둘 수 있는 공간이.


곧 있으면 이 자리의 주인인 둘째가 태어난다. 이 공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것도 한 달 남짓일까. 그런 생각에 잠기다 문득 생각난 김에 옆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딸에게 말해주었다. “어른이 돼도, 엄마가 되어도, 너만의 공간은 꼭 갖도록 해. 필요하면 이 책상을 가져가도 되니까, 알았지?”. 그러자 ‘아이 참 엄마는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당연하지!! 이 책상은 유이나 꺼야! 백십천 년이 지나도 내 책상이야!”.


푸흡. 안심이다.

그녀가 말하는 백십천 년이 얼마인지 가늠하긴 어려우나 여하튼 엄청 오래오래라는 건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아이와 함께 나란히 앉아...
우리, 여기서 어떤 상상을 펼쳐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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