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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는인간 Oct 16. 2020

그림을 그리니 보이는 것들

【가장 완벽하고 안전한 길】

계기는 어느 날 우연히 찾아왔다.
올여름의 끝자락, 어느 주말 오후의 일이다.


주말이라고는 하지만, 이불 커버 빨래에 청소기 돌리기. 화장실 청소와 몇 주 전 부터 신경 쓰였던 세탁기 내부 청소 등등 밀렸던 집안 일을 한 바탕 끝내야 하는 토요일 아침.


그렇게 후다닥 오전 시간을 보낸 뒤, 가벼운 점심을 먹고, 한 숨 돌리는 시간. 눈치 빠른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엄마, 우리 같이 그림 그릴까?” 하고 말을 걸어왔다. 요맘때 아이들 꿈이야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바뀐다지만 올해의 장래 희망을 ‘그림책 작가’로 정한 이후 (아직까지는) 흔들림 없이 유지하고 있는 그녀였기에 딸의 꿈을 응원하자는 마음으로 책상에 마주 앉았다.


고백한 바 있듯, 나는 그림 그리기에 조금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무얼 그려도 똑같이 그려내지 못하고 어그러지는 내 그림이 못나도 한참 못나보여서. 그래서 가장 안전하다는 ‘하지 않는’ 방법을 선택해 왔다. 그리고 난 뒤에 후회할 바에야 애초에 시도하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만 그럴까. 매사에 그랬다. 무엇을 시도하지 않음으로써 ‘실패하지 않는 나’를 지켜왔다. 일도, 관계도, 심지어 사랑에 있어서도. 시도하지 않음으로 인해 때를 놓치고 후회한 일들이 어디 한둘일까. 그럼에도 ‘하지 않음’의 유혹은 달콤하다. 시도하지 않으니 실패도 없고, 실패가 없으니 상처도 받지 않는다. 이 얼마나 정신건강에 좋은 일인가.


그렇다. 쓰지 않는 일이 가장 안전하다. 가장 완벽한 글은 쓰지 않은 글이다. 써진 글에서는 어떻게든 약점을 찾아낼 수 있다. 제목도 문체도 구조도 마무리도 어떻게든 더 나아질 수 있다.

_『마음을 썼다 내가 좋아졌다』 소은성, 웨일북


글도 그림도 마찬가지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림을 그려보니 보이는 것들】

그런데 요 그림이라는 게 참 재미있다. 아이가 함께 그림을 그리자고 한 이후로 매일 30분 정도 마주 앉아 그림 그리는 시간을 갖는데, 이 시간만큼은 아이가 나를 리드해 주는 선생님이 된다. 덩치만 큰 학생이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손 놓고 넋 놓고 있으면 야무진 꼬마 선생님이 다가와 말을 건넨다.


「엄마, 오늘은 꽃을 그려보자!」

「엄마, 오늘은 좋아하는 캐릭터를 그려볼까?」

「엄마, 오늘은... 도감을 보고 그리자. 이거, 인체 도감!!」


어디서 그런 아이디어가 샘솟는지 이런저런 방법으로 나를 이끌어 주는 아이. 이렇게 된 이상 뭐라도 그려내야 한다. 다 그리고 난 후엔 왜 그것을 그렸는지 까지 설명을 해야 그 날의 미술 교실은 마무리된다.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매일매일 그림을 그리다 보니 몇 가지 발견을 하게 되었다.


아이 하나, 엄마 하나. 우리 집 미술 시간 스케치북
아이가 처음 ‘같이 그림 그리자!’고 했던 날



1. 주변을 보게 된다

그림을 그리자!라고는 했지만 처음엔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막막했다. 그래서 집히는 대로 아이의 책장에서 그림책을 펼쳐 놓고 따라 그리기도 하고, 인스타그램의 일러스트 작가들의 작품을 베껴서 그려보는 것으로 시작을 하긴 했는데, 얼마 안 가 아이에게 혼쭐이 났다.


「엄마, 자꾸 뭘 보고 그릴 생각하면 안 돼.

내 머릿속에서 생각해야지.

똑같이 안 그려도 되니까 보지 말고 그려봐! 」


흐음... 하는 수 없이 턱을 괴고 책상 주변을 둘러보니 색연필과 가위, 노트 등이 눈에 들어온다. 그걸 재료 삼아 눈대중으로 끄적끄적. 어느 날은 식탁에 앉아 내일 아침 먹으려고 사다 둔 식빵이 눈에 들어와 스케치북 앞에 놓고 쓱삭쓱삭. 그러고 보니 컵도 있고, 가방도 있고, 우리 가족도 있고, 뭐가 많이 있네. 이것 참. 글쓰기랑 비슷하다. 어디 멀리 가서 찾지 않아도 지금 여기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다 쓸 거리, 그릴 거리가 되는구나.


주변에 있는 것들을 그려내면 되는구나...


남을 따라 그럴듯하게 가 아니라 내 눈으로 주변을 바라봐야 한다는 말. 많은 문호들이 책을 통해 그렇게 귀가 따갑게 알려준 것인데, 나는 또 머리로만 알고 이제야 깨달았다.



2. 자세히 보게 된다

하루는 인체 도감을 보며 그림을 그리자고 했다. ‘생명의 탄생’이라는 장에서 엄마의 뱃속에 있는 28주 된 태아의 모습을 그림으로 담아낼 때였다. 태아의 뒤통수는 이렇게 생겼구나. 엄마의 자궁 안에서 이렇게 몸을 움츠리고 있는 거구나. 그래서 손과 발이 움직일 때마다 여기 있어요, 하고 느껴졌던 거구나... 숨죽이고 있던 감각들이 그림을 그리면서 하나하나 전달되어 왔다.

인체 도감을 보고 그려본 28주차 태아의 모습


그간 ‘실패의 두려움’ 때문에 일러스트 같은 장난기 가득하고 단순한 그림만 그려봤지, 이렇게 부분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묘사하는 그림은 되도록 피해왔는데, 해보니 완벽하진 않아도 과정에서 느껴지는 섬세한 자극이 분명 있었다.


최근에 드로잉의 기법 중 하나로 ‘그림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사물을 바라보는 관찰력을 높이는 ’

컨투어 드로잉(contour drawing)’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컨투어(contour)는 사물의 윤곽을 뜻하는데, 종이에서 펜을 떼지 않고 사물의 윤곽을 따라 그리는 스케치 법이라고 한다.


그리는 손이 관찰하는 눈의 속도보다 빨라지지 않도록, 보이는 그대로를 손으로 옮겨 담는 일은 고정관념과 관습을 내려놓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나의 시선’을 키우는데 좋은 연습이 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나의 첫 컨투어 드로잉은 눈 앞에 있던 후추통
사심을 가득 담아 채색해 본 식빵과 모닝 롤



3. 마음을 보게 된다

 그냥 막 그려~


‘마음 가는 대로 붓을 놀리라’고들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매일 그리는 그림인데도 매번 뭘 그릴까 고민하는 나에게 꼬마 선생님이 답답한 마음에 던진 한 마디.


그래, 뭐 대작을 만들 것도 아니고 그냥 낙서나 하자는 건데 뭘 이렇게 고민을 사다 한다냐... 마음이 풀어지는 것도 잠시. 하나를 해도 제대로 해야 된다는 완벽주의자의 강박관념이 여기서도 어김없이 발휘되어 손과 머리를 딱딱하게 만든다.


그럴 때 커닝하듯 아이의 그림을 힐끗! 보면서 역시나 머리보단 손을 움직이는 것이 빠르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디즈니랜드에 가고 싶으면 디즈니 프린세스를 그리고, 엄마를 위로하고 싶은 날엔 스타벅스와 순두부찌개를, 옆에서 아빠가 섭섭해할까 봐 함바그 세트를 같이 그리는 우리 딸. 왜 꽃을 그렸어? 하면 ‘내 마음이 꽃밭인가 봐...’ 하는 아이에게서 나온 그림은 이렇게나 맑고 아름답다.


안나와 엘사(좌), 치어하는 모습(우)
한국음식 먹고 싶은 엄마에게 순부부찌개, 아빠에겐 함바그 스테이크와 삿뽀로 맥주


좋아하는 인형 라라짱


내 마음속엔 뭐가 있을까...?

그간 내가 그린 스케치북을 촤르르 펼쳐 보았다. 고구마, 감자, 계란밥에 참기름, 마카롱과 메론빵... 뭐 죄다 먹는 것뿐이냐. 그래 이게 내 마음인가 보다. 지금은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이고, 나는 뭘 먹어도 용서되는 막달 임산 부니까. 오늘은 소시지나 그려보자.


먹고 먹고 먹는 그림들
오늘의 그림. 소시지.



4. 마주 보게 된다

“엄마! 그림 그리기 대결이닷!!”


‘대결’이라는 단어를 던져 놓고 승부욕에 불타는 아이. 색연필 끝에서 불꽃이 튀겨 나올 듯 분노의 색칠을 하다 갑자기 성을 낸다. “뭐야, 엄마가 나보다 잘 그리네!”. 뾰로통하게 나온 입술, 씩씩거리는 콧등.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야... 엄마는 어른이고 유이나는 아직 다섯 살 이잖아. 엄마는 어른이 될 때까지 유이나보다 몇 번이고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조금은 잘 그리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어?”


“나도 엄청 많이 그리는데! 엄마가 회사 간 동안 나는 보육원에서 맨날 맨날 그리는데! 그럼 나는 엄마가 될 때까지 엄마보다 못 그리는 거야? 엄마가 될 때까지 그림책 작가는 못 되는 거야?”


아이고... 딸아. 넌 누구랑 싸우고 있니.

번지수를 한참 잘 못 찾았다는 생각이 들 때쯤.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 보았다.


“유이나의 그림도 특별하고 엄마의 그림도 특별해. 우리는 서로한테 이기려고 그리는 게 아니야. 앞으로 유이나가 그림책 작가가 되기 위해선 엄마보다 더~ 잘 그리는 사람이 많이 있을 텐데. 이것 봐, 여기 그림책 그린 사람들은 엄마보다도 훨씬 더 잘 그리잖아. 누구보다 더 잘하겠다고 하면 계속 싸우기만 해야 돼. 그런데 봐봐. 모두 같은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잖아. 스즈키 노리타케상은 스즈키 노리타케상의 그림을 그리고 하야시 아키코 상은 하야시 아키코 상의 그림을 그리고, 유이나는 유이나의 그림을 그리고...


그것보다 유이나가 왜 이 그림을 그렸느냐가
더 중요할 것 같은데!


앞으로 우리 ‘그림 대결’이 아니라 ‘그림 발표회’라고 하자. 그림을 그리고 왜 내가 이 그림을 그렸는지, 그리고 이 그림의 포인트는 뭔지 발표하는 거야. 그리고, 상대의 그림에 이것이 좋았다!라고 칭찬해 주면 어떨까?”


조금 긴 설명을 아이가 알아 들었을까?

눈을 들여다보니 흐음... 하고 생각에 잠기는 모습. 그 날 이후, 우리는 그림 대결 대신에 작은 발표회를 갖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 밤 그린 그림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마음을 나눈다. 이젠 안 그리면 내가 섭섭할 정도다.


아이가 질리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매일 밤 30분 드로잉은 계속될 것 같다.


그리고, 그리고, 아빠도 같이 그리고~





【덧】

세상만사 그렇듯 모든 건 장비 빨도 한몫한다.

(라고 쓰고 호구라 읽는다)

물론 나는 전문적으로 그림을 배우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예정에 없지만 매일 그리다 보니 템빨을 좀 세워봐야겠다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아이패드에 ‘프로크리에이트’라는 전문가용 유료 어플을 다운로드하여 보았는데 요게 요게 또 신세계다. 애플 펜슬을 이용하여 각양각색의 브러시와 색깔로 슥삭슥삭! (그래도 직접 종이에 그리는 게 더 재밌기는 하다)


다음은 아이의 입학 선물 명목으로 카란다쉬 80색 수채 색연필을 구입해 볼 예정이다!! 움화화!!


종이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음
프로 크리에이트로 그려본 그림! 짠짠!


▶ 여러부~운, 우리 아이의 꿈은 그림책 작가랍니다!!!  

https://brunch.co.kr/@dailytokyo/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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