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를 시작하는 제1 명제
고등학교 2학년.
한참 반항의 시기를 겪고 있었던 나에게 엄마는 멈추지 않는 눈물을 닦아내며 억울한 듯 이렇게 외쳤다.
다른 집 엄마들은 어떻다는 둥, 엄마라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둥, 엄마면서 왜 나랑 똑같이 그러냐는 둥, 이럴 거면 나를 왜 낳았냐는 둥 … 지금 생각해보면 수도 없이 엄마의 가슴을 찢어내는 듯한 날카로운 말들을 잘도 뱉어냈었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독을 품은 말로 엄마를 일부러 상처 입히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이.
아닌 게 아니라 그렇게 해서 엄마가 날 포기해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 날 이후 엄마를 대하는 내 생각은 바뀌기 시작했다.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 그래. 이 여자… 태어나서 엄마를 처음 해 보는구나’라고. 나에게 엄마는 당연히 엄마였고, 태어날 때부터 머리털 나고 쭈욱 그냥 내 엄마였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 사람, 원래는 엄마가 아니었구나. 게다가 지금 처음 하는 일 투성이겠구나. 내가 불안한 것만큼 이 사람도 불안한 것 투성이에 앞이 보이지 않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거구나. 내가 처음 고등학생이 되었듯이, 이 여자 또한 처음으로 40대를 겪고 있는 거구나. 이 당연한 걸 왜 그동안 몰랐을까. 왜 내 멋대로 엄마란 처음부터 엄마이고 엄마다워야 하고 엄마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까.
이럴 거면 왜 날 낳았어!’
홧김에 던진 말이었지만, 아마 엄마는 이럴 줄 알고 날 낳진 않았을 거다.
그저, 뱃속에 태어난 생명이 소중하고 고마워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하겠노라고 다짐 또 다짐을 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 사실을 아는데 까지 십 수년의 시간이 걸렸다. 내 뱃속에 뜨겁고 꿈틀거리는 새로운 생명이 생기고 나서야 겨우, 그때 엄마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엄마는 내가 낸 상처를 당신 혼자 치유하고 있었을 생각을 하니, 상처의 골이 깊어 앞으로도 영영 아물지 못해 불쑥불쑥 튀어나와도 그저 덮어두어야 할 것을 생각하니, 그 옛날 엄마가 내가 보였던 그 눈물이 이제는 내 눈에 흐르고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출산을 앞둔 산모들에게 ‘태담’은 아주 좋은 태교 방법 중 하나다. 아이의 태명이나 이름을 불러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동화책을 읽어 주기도 하고, 좋은 태교 음악을 들려주기도 한다.
나 또한 임신 중에 공원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으면서, 욕조에 몸을 담그면서, 잠자리에 들기 전 이불을 덮으면서 … 하루에도 몇 번이고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절주절 나누곤 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엄마를 잘 못하면 어떻게 하지.
우리 아이에게 엄마다운 엄마가 되지 못하면 어쩌지.
‘이럴 거면 날 왜 낳았어’라고 했을 때, 나는 그 아이에게 어떤 대답을 해 줄 수 있지.
그렇게 돌고 돌아 도착한 근본적인 물음.
나는 왜 아이를 낳는 거지….
아직 답을 찾지는 못했다.
다만, 고민 끝에 뱃속의 아이와 한 가지 약속을 하기로 했다.
때문에 이 만남 속에서 내가 모르는 수많은 일들이 예고 없이 닥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어쩌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과제들을 남길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 내게 다가온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있었던 어떤 만남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한 가지 그리고 꼭 지켜내야 하는 약속 한 가지는 이 만남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수많은 만남과 이별이 인생에 존재하지만, 아이와의 인연만큼은 내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이어나가야 하는 약속이다. 지금까지 많은 시행착오와 연습들이 있었지만, 아이와의 만남은 숨이 멎는 그 순간까지 지속될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경험이 될 것이다. 내 인생의 모든 첫 경험이 그러하듯이 나는 좌절하고 방황하고 길을 잃겠지만, 포기는 하지 않겠노라고.
그 옛날 우리 엄마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네가 앞으로 만날 엄마가 엄마답지 못하고, 엄마로서 형편없고, 부족하기만 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어. 그렇다면 정말 미안해. 하지만 딱 한 가지는 약속할게. 알콩이가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이 닥치든 엄마가 목숨을 걸고 지켜줄 수 있는 약속은, 언제라도 네가 돌아올 수 있는 그런 장소가 되어줄게. 늘 너의 엄마로 있을게. 넘어지고 깨져도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너의 스타트라인이 되어줄게. 엄마도 처음이지만 열심히 해 볼게. 잘 부탁해요…’ - 뱃속의 아이에게, 임신 31주 차에 보내는 편지
아이가 세상에 첫 발을 내딛는 것도
처음 ‘엄마’를 부르는 것도
제 두 다리로 걷는 것도
모두 처음인 것처럼
딸을 키우고
학교를 보내고
시집을 보내고
손주를 보고
엄마의 일도 마지막까지 처음 하는 것 투성이겠지만
우리 이 만남을 소중히, 포기하지 말자.
저자 크리스틴 오버롤
역자 정명진
출판사 부글북스
출판일 2012.03.20
책 정보: 네이버 책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865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