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2. 13.
입술이 텄다. 집에 갈 때가 된 모양이다. 호텔 로비에서 중국인이 캐리어를 정리하고 있다. 한국인들만 음식을 싸 갖고 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캐리어는 온통 라면과 통조림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맨 먼저 찾은 곳은 의회 박물관이다. 주변의 도로는 잘 단장되어 있고 유명인의 동상이 곳곳에 있다. 높은 담장 위의 초소에는 경계병들이 총을 겨누고 있고, 무장한 병력들이 곳곳을 삼엄하게 경계한다. 관람 신청을 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직원을 따라 내부로 들어갔다. 2006년 대중에게 공개된 박물관은 2,500년의 인도 역사와 함께 주로 영국 제국주의 식민지를 거쳐 오는 과정에서의 인도의 독립과 민주주의 발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1905년 영국의 벵골(Bengal) 분할 조치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 1942년 8월 민중봉기, 찬드라 보스의 흥분된 연설 등 인도 독립투사들의 활동과 희생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스토리마다 음향과 비디오 애니메이션이 미리 설정되어 있고, 유치한 수준이지만 가상현실과 파노라마 프로젝션이 설치된 부스도 있어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운동을 펼치는 간디와 함께 노래하면서 걸을 수도 있다.
중앙 홀에는 인도의 초대 총리를 지낸 네루(Jawaharlal Nehru)가 1947년 8월 14일 자정에 행했던 독립에 관한 연설(Tryst with Destiny)이 밀랍 인형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다. 독립투사들의 밀랍 인형 옆에 나란히 앉아 인도인의 독립의지를 새겨들으면서 일제와 싸웠던 우리의 선열들을 잠시 기리는 시간을 가졌다. 유명한 곳도 아니고 관람에 제약이 따르지만 인도의 독립에 대해 존중을 표할 수 있는 곳에 온 것이 보람차다.
하루 두 끼만 먹는 것에 익숙해지다 보니 배가 고프지는 않지만, 코넛 플레이스에 있는 맥도널드가 눈에 밟힌다. 인도에서의 햄버거는 언제 먹어도 맛있다. 간단히 배를 채우고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아그라센 키 바올리(Agrasen Ki baoli)로 향했다. 물 부족에 대비하기 위해 땅을 깊게 파고 건설한 14세기의 계단식 저수지이다. 거대한 요새의 일부처럼 보일 뿐 저수지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인도인의 창의적인 예술성에 경이로움이 느껴진다. 밑으로 깊게 뻗은 계단의 양편에는 이완 모양의 회랑이 10여 개씩 4층에 걸쳐 있어 아파트 같은 느낌을 준다. 계단에는 시민들이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고, 데이트를 하는 연인이 다정하게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08개의 계단을 따라 밑까지 내려갈 수 있으나 지금은 통제되고 있다. 「PK, 별에서 온 얼간이(2014)」에서 아미르 칸(Aamir Khan)이 계단에 앉아 종교를 고민하던 장면이 생각난다.
대통령궁 라슈트라파티 바반으로 가는 길에는 인디아 게이트가 있다. 파리의 개선문을 바탕으로 설계되어 1931년 완성된 기념비로, 제1차 세계 대전과 1919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전사한 영국령 인도 제국의 군인 약 8만 5천 명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높이 42m의 아치에는 전사한 인도 병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인도의 자치 정부를 원했던 간디는 영국을 믿고 제1차 세계대전에 연합군으로 참전한 영국에 협조했다. 하지만 영국은 약속을 배반하고 인도인의 자유를 제한했으며, 재판 없이도 투옥할 수 있는 롤래트 법(Rowlatt Acts)을 통과시켰다. 간디는 영국에 대한 비협조 운동을 전개하면서 전국적인 파업을 주도했으나, 침략자인 영국을 위해 수만 명의 인도 젊은이들의 목숨을 잃는데 동의했다는 비판을 면하기는 어렵다. 뭄바이의 게이트웨이 오브 인디아가 인도를 통치하는 영국 제국주의의 상징이었다면, 인디아 게이트는 인도인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다. 뭄바이처럼 여기에도 셀 수 없는 인파들이 게이트를 둘러싸고 있다.
약 2km 떨어진 대통령궁까지 차량이 통제된 4차선 도로가 반듯하게 뚫려 있다. 도로의 양편에는 잔디밭이 깔려있는 넓은 공원이 만들어져 있어 나들이하는 가족들, 소풍 나온 학생들, 크리켓을 즐기는 이들이 한가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대통령궁 500m 앞에서는 바리케이드를 설치한 채 무장한 군인들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3시가 넘어서 입장이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 다행히 나까지 허가하고 뒤부터는 차단한다. 하지만 궁까지는 입장할 수 없고 입구에서 모습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무굴 제국과 서양의 건축이 혼합된 대통령궁은 영국의 영원한 인도 통치를 상징하기 위하여 영국 총독의 관저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약 19,000㎡ 규모의 4층 건물로 340개의 방이 있으며, 약 130만 ㎡에 달하는 시내 중심가의 부지에 자리 잡고 있다. 영국과 무굴 제국의 양식에 따라 설계된 궁의 서쪽에 있는 드넓은 무굴 정원에는 다채로운 색의 꽃, 분재, 관목, 장식용 분수와 이국적인 분위기의 장미로 가득하다고 하는 데 늦게 와서 들어갈 수 없어 안타깝다. 미세먼지가 자욱하지만 건물 꼭대기의 돔 위로 펄럭이는 인도 국기는 선명하다.
레일바완 역(Rail Bhawan station)에서 로터스 사원까지 지하철이 연결되어 있고 30분이면 도착한다. 칼카지 역(Kalkaji Mandir Station)에서 내려 10루피에 릭샤를 합승하면 쉽게 입구까지 갈 수 있다. 로터스 사원은 모든 종교가 하나이고, 인류는 한 겨레이며, 지구는 한 나라라고 주장하는 바하이교의 사원으로, 그 외관을 따서 연꽃 사원(Lotus Temple)으로 부른다. 높이 40m의 거대한 연꽃은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27개의 꽃잎이 세 겹으로 덮여 있다.
독특하고 아름다운 외관과 타 종교를 배척하지 않는 종교관으로 무척 많은 인파로 북적거린다. 최대 2,500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중앙 홀에는 수백 개의 4인용 돌의자가 연단을 향해 둥글게 펼쳐져 있다. 수십 명의 관광객들이 한꺼번에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기를 반복한다. 수행을 하는 곳임에도 진지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연꽃 위로 떨어지는 붉은 낙조가 정원의 야자수와 어울리면서 매우 환상적인 장면이 연출된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광경에 감탄을 하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오늘도 이렇게 날이 저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