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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쓰는 이작가 Mar 22. 2018

카페 생활자

어디서 일 해요? - 1.  


카페에서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썼다. 일이 잘 될 때는 종일 있기도 하고 작업이 안 되면 하루에 서너 군데의 다른 카페들을 옮겨다니기도 했다. 종일 한 마디 할 건수도 없는 날에도 "안녕하세요"라던가, "아메리카노요" 라고 말할 수 있었다. 가끔 인사를 주고받거나 짧은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내성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나의 마감을 응원해주던 동네 카페 사장님은 아직도 고맙다. 작업이 길어지는 날은 더는 마시지 않을 커피를 여러번 주문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운 좋게 어느 영화가 개봉하게 되면 그 시나리오를 주로 썼던 카페에 시사회 티켓을 선물하는 것이, 받는 사람도 도무지 영문을 모르는, 나만의 '세레모니'였다. (지금 생각하면 친구나 줄 걸 그랬다. 의미는 백 이십인데, 알아먹는 사람은 없었으니...)


일 하기 좋은 카페의 조건이란-



1. (음악을 포함한) 적당한 정도의 소음.


음악은 흘러가야 한다.

들리지만 귀에 머물지 않고, 무드를 만들되 무대는 없어야 한다. (랩퍼에게 라임이 중요하다면, 작가에게는 운율이 중요하다. 꼭 이렇게 끼워 맞추게 되더라) 가사가 있고 없고는 중요치 않다.

간혹 기세가 기울어 가는 카페에 가면 죽어라 재즈만 틀던 사장님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심경을 대변하는 노래들을 메들리로 틀기 시작하는데, 절대로 '씬 넘버'가 늘어지 않을 뿐더러 어떻게든 쓴다 한들 주인공의 캐릭터는 급격히 말수가 줄 것이며, 맥락없이 비장해지거나 반대로 '사는 게 다 거기거 거기'라는 허무주의적 태도에 빠질 것이다. 즉- 집에 가서 다시 써야 한다.



2. 그 날의 구성원.


어쩌면 그 날의 '작업운'이랄까. '화이트노이즈'의 채도를 결정한다고 할 수 있다. 깨끗한 백색일 수도, 탁한 흰색 일 수도, 희끄무레하다 못해 너저분해지면, 그 날은 오래 머물 수가 없다. (물론 작업이 급하면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 어쩌면 내가 그 날의 '이제 그만 나가줬으면 하는 손님'일 수도 있기에, 누굴 탓하려는 건 아니고 전적으로 '랜덤'이다.

다만 '랜덤'은 동네의 분위기를 탄다. 테이블 하나 건너 노트북이라 '요새는 애플이 흔해졌구만...'하는 동네가 있는가 하면, 게임과 유투브 동요가 뒤섞인, '다진 소고기 토핑의 오가닉 치커리 라떼' 같은 분위기를 '겪어내야'하는 곳도 있는 것이다.


한창 예민할 때는 얼핏 남의 모니터에 '대사와 지문'형태만 보여도 같은 직군을 피해 짐을 싸서 나오곤 했는데, 이제는 너무 많아져서 '흔해 빠진 작가가 저기도 있군' 하고 넘어가게 됐다.



글을 쓰기 위해 고립을 자처하는 작가도 있지만, 일부러 사람 많은 카페를 찾아다니는 작가라면 이런 마음의 사정이지 않을까.  



"날 좀 감시해줘."



적당히 편해서 카페가 좋다면서 아이러니한 긴장감도 생기는 것이다.

커피 한 잔에 죽 치고 있는다는 게 마음 편한 일은 아니라, 주문한 만큼의 시간을 따져서 바짝 마치고 나오려 한다. 적어도 '오늘의 커피값'만큼은 하고 가자는 '결심'이 생기는 것이다.



홍대가 홍대 같던 시절의 홍대 스타벅스에 매일 오던 할아버지가 아직도 기억난다. 등허리까지 오는 숱 없는 백발에 구멍난 잠바만 입으면서, 자리값으로 일부러 제일 많은 커피를 시키는 신사적인 노인이었다. 가져 온 신문을 읽고 노트에 뭔가를 끄적이다 갔는데, 일하던 친구 말이 시를 쓰는 거라고 했다. 시 쓰던 그 노인은 지금은 어느 카페에 있을까? 혹시 죽었을까? 늘 두 잔의 커피와 샌드위치를 시키던 그 할아버지는, 팔랑이는 꽃무늬 원피스를 즐겨입던 예쁜 척 하던 여자 작가는, 카페 말고 길거리에서도 여러 번 마주쳤지만 절대로 아는 척 하지 않았던 그 남자 작가는.....지금은 모두들 어디로 갔을까.


지금은 작업실을 얻었다.

덕분에 이제는 나도 커피를 마시기 위해 카페에 간다. 친구와 이야기나 하다가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일어날 수 있다. 노트북 말고 괜히 책 하나 들고 나가서 핸드폰만 들여다보다 올 수 있다. 그래도 급하게 끝내야 할 일이 생기면 카페에 가게 된다.



p.s. 막상 오랜만에 노트북 챙겨 카페에 가려다 생각드는 게, 이거저거 다 맞아떨어져도 제일 중요한 건 바로- ‘화장실’이었다. 상가와 공용으로 쓰지 않는, 카페 내부의, 청결한, 여자, 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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