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문에도 스타일이 있다고요-
결말을 향해 가는 시나리오에서, 주인공이 키스를 하게 되었다. 키스씬을 쓰다가 문득-
'아.....이거 오랜만에 키쓰씬을 써 보는군.'
하고,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오랜만인 것이, 이전의 작업에서는 '되도록 서로 만지지는 말아달라는' 색다른(?) 요청이 있었고, 한동안은 나의 주인공들이 연애고나발이고, 살 길 찾느라 바쁜 사람이들이었던 데다, 최근의 작업에서는 커플이 셋이나 있었음에도 누구도 키스하지 않았다.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오랜만의 키스씬이라 조금은 쑥스러운 기분으로 장면을 쓰기 시작했다. 주인공이 영원한 작별을 앞두고 있기에, 그냥 키스하긴 뭐해서 이래저래 공을 들여갔다. 애틋하게 서로를 보며 아프게 키스를 나누는 두 사람....어쩌고 쓰다보니 또 문득- 이게 뭔소린가 싶어졌다. 아프게 나누는 키스라니, 뭐 하다가 깨물기라도 한다는 건가. 닿을 듯 말듯 감질난 입맞춤 정도인 건가? 그나저나 키스를 나누는 건 또 뭐야, 하면 하고 말면 말지, 어떻게 주고받을지 순서라도 정하잔 거야?
영화의 지문을 쓰다보면 내가 쓰면서도 가끔- '어쩌라고' 싶은 때가 있다. (주로 작업이 길어지면서 자조적인 심정이 될 때 그렇다.) 예를들어 '무겁게 서로를 본다'거나, '아프게 서 있다'거나 하는 등의 말도 안 되는 소릴하는건데,
"그러니까 제 말은요....상황이 이렇게까지 되가지고 주인공이 도무지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고, 잡아주길 바라지만 그렇다고 안 갈 수도 없는 그런 거 있잖아요...."
라고, 나도 잘 모르겠는 걸 배우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감정을 설명하는데 애를 먹는 나 같은 작가가 로맨스를 쓰기에 벌어지는 일일텐데, 간혹 '밀회' 같은 기가막힌 멜로 드라마를 보다보면, 저 장면의 지문은 뭐라고 써 있을까 궁금해져서 대본을 찾아볼 때도 있다. 특별히 묘사가 구구절절하기 보다는 오히려 장면에 비해 단촐할 때가 많다. 캐릭터의 밀도가 단단하면 구차한 설명이 필요없는 거구나....탄복하며, 무겁게 돌아서는 나......
결국 지문이란 영화의 색깔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서, 기왕이면 영화에 맞는 적절한 표현들을 풍부하게 쓰려고 한다. 그렇다고 모든 영화의 지문이 그럴 수는 없는 게, 하드보일드한 영화라면 지문도 간결할 수 있다. 장르에 따라 같은 행동을 해도,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은 느낌을 드러내는 게 지문이다. (왜 이렇게 로버트맥기 작법서 처럼 이러는지 모르겠다.....지문이란 게 설명인데, 설명을 설명하다보니 설명이 길어지고 있다.....)
느낌을 드러내기 위해 작가 마다 자주 쓰는 표현이나 방식이 생기기 때문에, 지문은 또한 작가의 스타일 때도 있다. 그리고 아예 스타일을 없애버리는 스타일도 있다. (로버트 맥기 작법서가 2탄이 나왔다는데, 로버트맥기도 이렇게 설명 길어지다 보니 그 두꺼운 걸 또 낸 것 같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봐야, 배우들이 마음대로 할 거기 때문에 서로가 알아먹게 쓰는 게 제일이다. 아니, 배우들이 알아서 잘 할 거기 때문에로 고치자. 지문은 이래서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