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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쓰는 이작가 Aug 15. 2018

‘미’의 사생활

마이너스럽다의 다른 말로,

나는, '미'다.

도.레.미.파.솔.라.시.도. 할 때의 '미'


무슨 말이냐면, 어느 사람이 가진 정서랄까. 낮고 차분한 사람이 있고 높고 가벼운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사이 어딘가에 걸린 사람은 더 많고, 한 사람이 높고 낮음을 넘나드는 건 더 당연하다. 때로는 낮은음자리까지, 또는 한 옥타브 더 하이텐션으로. 아무튼 그렇게 계명으로 정서라는 걸 설명하곤 하는데, 그때마다 "나는 '미'라서 말이야."라고 시작하게 된다.


'미'의 인간인 나는 주로 로맨틱 코미디를 썼는데, 그럴때마다 가장 힘든 것은 '미'를 '시'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사람의 정서가 글이나 그림, 뭐 어느 방식으로든 드러날 때, 그건 그 작품의 '톤'이 되는데, 로맨틱 코미디의 톤이란 '시'에 다다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 그냥 내가 지어내고 있는 말이다.)  

도.레.미.파.솔.시.도. 할 때의 '시'  


그러다 보니 작업을 할 때마다 이런 응원(?)을 받는다.

"작가님, 좀 더 끌어올려야 돼."


1씬은 '미'로 시작해서 클라이막스에 '시'에 다다르라는 게 아니다. 매 씬의 정서가  '시'의 언저리처럼 높고, 가볍고, 경쾌해야 하는 것이다. 즉- '시'의 인간으로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넘어져도 그냥 넘어지지 말고 크게 자빠져야 하는 것이다. 웃으려거든 크게 웃고, 우울하더라도 히스테릭하게 발산한다면 이것 또한 '시'다. (다시 말하지만 다 내가 지어내고 있는 중이다.)  


이런 정서의 간극은, '같은 설정'을 두고도 다른 이야기를 하게 만든다. 나의 주인공은 대체로 '냉소적 반지하 미남'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시'의 정서로 간다면, '싸가지 재벌 왕자님'으로 하늘과 땅차이가 되는 것이다. TV드라마라면, 앞의 것은 '단막극' 정도에 자주 나오고, 후자는 당연히 '공중파 미니시리즈' 단골이다. 물론 늘 그런 것은 아니다. 대체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간혹 이때문에, "작가님은 정서가 좀 마이너한 거 같애." 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마이너 정서란 B급 정서라는 것과도 좀 다르면서, 그렇다고 반댓말은 메이저 정서는 아닌, 뭐랄까.....그냥 내가 까인 그간의 소재들을 돌이켜 보건데, '대중성이 부족하다'라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래서 작업을 시작할 때는 '시'가 되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럴 때 음악을 듣는 것은 위험하다. 음악이란 너무나 강력해서 순식간에 기분을 좌지우지 하는데다 애초에 '미'의 인간이 좋아하는 노래라는 것이 신나봐야 멜랑콜리...라서, 분위기를 따라 흐르다 보면 자칫 '미'를 지나 '단조'로 떨어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음악 금지, 우울한 나에 도취되기 금지, 즐거웠던 지난 기억 헤집기 금지, 이것도 금지, 저것도 금지... 아니, 사람이 신나기가 이렇게나 힘이 드는 일인가?!  


로코의 여주인공들이 대체적으로 기가 쎄고 자기주장이 강한 데는 이런 영향이 있을 것이다. 기분을 끌어올리느라 이렇게 온 힘을 쏟았는데, 평범하다 소리 보다는 차라리 '귀여운 미친년' 소리가 나름의 노고에 대한 보상처럼 느껴지는 것. 

작업을 마치나면 슬슬 헷갈리기 시작한다. 로코를 썼는데 마치 느와르를 끝낸 사람 마냥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시'의 상태를 쓰면서 망하지 않고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미'의 인간인가, '시'의 인간인가.  아니지, 그건 '시'여야만 하는 작업이었고, 이건 내가 '미'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어쩌면 나는 사실 '시'였는데, '미'인 척 하고 있는 걸까? 


어차피 다 나 혼자 지어낸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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