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도 참아야 해, 버텨야 해

쉰 살의 유학일기 - 여름편 #5

by 히토리

7월 17일은 우리나라에서는 ‘제헌절’, 일본에서는 ‘바다의 날’이다.

나 어릴 적엔 제헌절도 국경일이어서 쉬었는데 요즘은 안 쉰다.

일본의 ‘바다의 날’은 공휴일이다. 일본에 와서 처음 맞는 연휴였다.

유학생 신분이라 삿포로 이외의 곳으로 가서 숙박을 하게 되면 미리 학교에 신고를 해야 하기 때문에 연휴라고 해서 혼자 멀리 갈 생각은 없었고 삿포로 시내의 대중온천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금요일 밤부터 아팠다.


금요일 오후,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 먹었다.

생긴 건 딱 시모나처럼 생겼는데 안에 팥은 없고 홋카이도 산 우유 아이스크림만 들어있는 거였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공원을 가로질러 걸으면서 딸들과 카톡도 하고 하다 보니 2/3 쯤 먹었는데 아이스크림이 녹아 맛이 없어졌다.

주변에 휴지통도 없고 들고 있자니 녹아 흘러내리면 끈적일 것 같아서 얼른 먹어치워 버렸다.

그게 탈이 난 모양이었다.

나는 평소에 우유도 잘 받지 않는 체질인 데다가 자주 체한다.

몇 년에 한 번 정도는 정말로 심하게 토사곽란*의 수준으로 체하기도 한다.

하필 그 몇 년의 한 번이 이번이었다.




일본의 집들은 변기와 세면대, 욕조가 따로 분리되어 있는 구조가 많다.

지금 살고 있는 우리 집도 그렇다.

현관문을 들어서면 바로 변기만 달랑 있는 화장실이 있고, 문 하나를 열고 들어가면 미닫이문으로 공간을 나눌 수 있는 침실 겸 거실과 작은 주방이 있다.

또 하나의 문을 열면 세면대가 있고, 샤워부스 같은 문을 또 열어야 욕조가 있는 욕실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 집은 한국처럼 바닥에 물을 좍좍 뿌려 닦을 수 있는 곳은 욕조가 있는 욕실뿐이며 화장실에서 욕실까지 가려면 문을 네 개를 열고 가야 한다는 말이다.


화장실엔 달랑 변기 뿐이고 바닥은 건식이라 걸레질로만 청소해야 한다.


금요일 밤, 나는 토사곽란의 상태였다.

밤 10시경에 살살 배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12시가 조금 넘으면서부터는 상태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바닥에 땀이 떨어지는 소리가 뚝뚝 들릴 정도로 식은땀이 나고 오한으로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였다.

배가 너무 아파서 몸이 꼬부라지는데 배를 움켜잡을 수도 없이 손이 모로 틀어졌다.

변기에 앉아있지도 못할 만큼 어지러워 눈앞은 캄캄해졌다 하얗게 밝아졌다 했고 귀에서는 삐~~~잉하고 쇳소리가 울렸다.

처음 겪는 일이 아니라 무섭지는 않았다. 대부분 이럴 때는 위아래로 한바탕 다 쏟아내고 탈진해 몇 시간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혼자였다. 아픈 것보다 뒤처리가 더 걱정이었다. 아무도 나를 대신해 치워 줄 사람이 없는 거다.

필사적으로 버텼다. 이 빌어먹을 화장실에서 자칫 실수라도 하면 속 시원하게 씻어낼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저 먼 욕실까지 왔다갔다 할 기운은 더 없다.

이 작은 화장실에서 모두 쏟아낸 후 기운 날 때까지 쉬려면 절대로 실수하면 안 됐다.

사투를 벌인다는 말이 이런 건지…

날이 훤하게 밝아올 무렵 겨우 속이 진정됐다.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 입고 있던 티셔츠가 젖어서 몸에 달라붙어 벗어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추워서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몸을 담그고 한참을 쉬었다.

잘했어, 깔끔했어!




가족과 함께 있었다면 급한 대로 약국에서 약이라도 사 오라고 시킬 텐데, 아니 어젯밤에 응급실에 갔을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나는 지금 혼자 산다. 그것도 외국에.

구글맵을 뒤져서 집 근처 내과를 찾아갔다.

학교의 긴급전화는 365일 24시간 연결되는데 그걸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학교에서 오리엔테이션 때 알려준 병원 통역 서비스도 24시간 핫라인인데 그것도 생각 못 했다.

파파고에 간밤의 증상을 다 적어서 번역해 놓고 의사 선생님한테 보여줬다.

청진하고 촉진하고… 의사 선생님이 쉬운 일본어로 천천히 물어봐줘서 그럭저럭 의사소통은 됐다.

약 처방을 받았는데 한국과는 참 다르다.

약을 병원에서 직접 줬다. 토하거나 속이 안 좋을 때 먹는 약 딱 하나, 4일 치. 주사도 없다.

약 다 먹고 괜찮으면 오지 말고, 계속 안 좋으면 다시 오란다. 끝!!


내가 갔던 동내 내과. 토일공휴일에도 아침 8시에 오픈한다.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이번에 받아 온 약과 약에 대한 간단한 설명서. 달랑 이거 하나 받아왔다.


내가 제대로 진료를 보고 온 게 맞는 건지, 내가 못 알아듣고 빼먹은 게 있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집에 와서 얼마 전에 가입한 맘카페에 글을 올려 물어봤다. (내가 이 나이에 맘카페의 도움을 받을 줄이야!!)

감사하게도 많은 일본에 사는 맘회원님들이 일본은 주사도 잘 안 주고 이렇게 한 가지 증상에 맞는 한 가지 약 처방만 하는 경우가 많다고 답글을 달아주었다.

다행히 내가 빼먹고 오거나 흘려듣거나 하진 않은 모양이다.

약처방 방식은 달라도 한국과 일본 병원이 같은 건 있더라.

대기실에서 보니 벽마다 마늘주사, 비타민D주사, 백옥주사 같은 거 홍보하는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일본 의사도 살림살이가 그다지 예전만 못한가 보다. ㅎㅎ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속을 달래기 위해 우버이츠로 죽을 배달 시켜 먹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아픈 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가까운 병원도 뚫었고, 한국에서 배민도 못 시키던(=안 시키던) 내가 일본에서 우버이츠도 시키고, 경험치가 하나씩 쌓인다.


*토사곽란 : 세균성 급성 위장염이 토사곽란(吐瀉藿亂)이다.

구토하여 뱉어 버린다는 토, 설사로 쏟아버리는 사, 갑자기 고통스럽게 진행되는 곽, 그로 인해 혼란스럽고 어지럽다는 의미다.

동의보감에선 “갑자기 명치끝이 아프고 위로는 토하고, 아래로는 설사하면서 오한과 함께 열이 심하게 나며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운 증상”이라고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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