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동화 같은 날들

쉰 살의 유학일기 - 가을편 #12

by 히토리

남편이 귀국하고 난 다음날, 37년 지기 친구가 일본으로 왔다.

중학교 2학년 때 친해진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내 인생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7명의 친구 중 한 명이다.

친구는 워킹맘인데 건강상의 이유로 1년간 휴직하는 중에 내가 있는 곳으로 여행을 왔다.

남편과는 온전히 휴식을 취했지만 일본여행이 처음인 친구에게는 삿포로의 구석구석을 보여주고 싶었다.

홋카이도는 지금 가을이 절정이다.


친구가 찍은 홋카이도의 가을

오전에 내가 학교를 가야 하는 평일, 집에 친구를 두고 집을 나섰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현관문 벨을 누르는데 기분이 너무 좋았다.

이곳에 살기 시작한 이후로 내 손으로 우리 집 벨을 누를 일이 한 번도 없었다.

남편이나 딸이 왔을 때는 학교 방학이거나 내가 학교를 빼먹거나 해서 누군가를 남겨놓고 집을 비운 적이 없었다.


“어서 와~”


친구가 문을 열어주는데 얼마나 신이 났던지.

이래서 사람들이 룸메이트를 구해 동거를 하고 결혼을 하고 가족을 이루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하필 친구가 있는 동안 천장 형광등이 나갔다.


“의자 잡아줘야 하니까 나 있을 때 형광등 갈아야지. 너 혼자서는 위험해. 얼른 새 형광등 사 오자.”


우리 집엔 의자라고는 다이소에서 사 온 목욕의자밖에 없다.

높은 천장의 형광등을 갈자고 필요 없는 사다리를 살 수도 없고, 사람을 부를 수도 없고, 혼자 있었으면 꽤 난감했을 터였다.

목욕의자가 부실해 딛고 올라서기 불안했는데 친구가 밑에서 단단히 잡아줘서 무사히 형광등도 교체했다.


친구는 여기 있는 동안 내내 고운 단풍에 감탄했다.

하지만 나는 친구와 함께하는 그 시간 자체가 참 좋았다.

수백 번도 더 나누었던 어린 시절 추억 이야기, 점점 더 부모 품을 벗어나 어른이 되어가는 자식들 이야기, 이제는 우리가 보호자가 되어버린 부모님 이야기, 아웅다웅하면서도 20년 넘게 살다 보니 이제는 제일 친한 친구가 된 남편 이야기…

4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한 친구와 나누는 시간은 담백하지만 진했다.

같이 보고 같이 먹고 같이 이야기하고 같이 잠드는 시간, 그 모든 시간이 동화처럼 예쁘고 좋았다.

친구가 귀국한 날, 빈집에 들어오는 게 별로 힘들지 않았다.

남편은 나를 걱정해 순돌엄마라도 불러 술 한잔 하라 했지만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아서 그냥 혼자 있었다.

남편이 떠난 빈자리를 바로 친구가 메꾸어 주었고 그러다 보니 거의 보름정도의 긴 시간을 누군가와 함께 해서 그런가 혼자 있는 것도 괜찮네하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는 중 친구에게 카톡이 왔다.


학교 잘 다녀왔어?^^

4시 반 넘으면 깜깜해지던 삿포로가 생각나네

벌써 그립다.


울컥… ㅜㅜ

아무렇지도 않은 게 아니었다.

그저 눌러놓고 있었나 보다.

혼자 있는 자유를 즐기고 싶어서 떠나왔는데 역설적이게도 혼자 있는 동안 같이 사는 삶의 소중함을 깨닫고 있다.

가족이든 친구든 반려동물이든, 마음을 나누고 체온을 나누고 서로가 돌보는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가을만 깊어가는 게 아닌가 보다.

그리움도 깊어간다.

돌아가면 참 고맙게 생각하며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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