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후우울증 생존자의 수기7] 초심 잃지 말고 아이나 잘 보라는 말
조산한 나만 죄책감을 갖는 게 아니라고 해서, 자녀의 질병이나 장애에 대해 엄마를 비난하는 사회 구조가 있다고 해서, 죄책감이 완전히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나의 조산이 아이의 건강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끊임없이 일깨워주는 공간이 있었다.
24개월, 아이의 발달 검사를 위해 또다시 병원을 찾았다.
“‘크다/작다 구분이 되나요?”
“아직 못하는 것 같은데요."
“색깔 구분을 하나요? 빨간색이 뭐냐고 물으면 가리킨다든지.”
“할 때도 있기는 한데 확실하게 아는 것 같지는……”
“많다/적다 구분은 되나요?”
“음. 안되는 것 같은데요.”
"……"
검사를 마치고 선생님께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저희 아이가 좀 느린가요?"
선생님은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혹시 늦다 하더라도 엄마가 책 많이 읽어주시고, 또래를 만나 자극을 받을 수 있게 해주시면……"
아이의 발달이 늦으면, 병원에서 알려주는 해결책은 이런 것이다. '엄마가 책을 많이 읽어주고', '또래를 만날 수 있도록 문화센터 같은 곳에 데리고 다니며' 엄마가 자극을 주어라. 혹은 (엄마가) 재활을 (데리고) 다녀라.
검사 결과를 마치고 찜찜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찜찜함은 점점 자라났다. 선생님의 그 침묵은 무슨 의미였을까? 선생님이 물어보는 것들을 왜 아이는 하지 못했을까? 아이는 발달이 많이 느린 걸까? 내가 너무 넋놓고 있었던 것 아닐까?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크다 작다 인지가 안되면', '많다 적다 구분 가르치는 법' 검색어를 입력하자, 발달이 느린 아이들의 부모가 모인 카페의 글이 좌르르 쏟아졌다. 그곳의 부모들은 돌잡이**을 사서 지칠 때까지 읽어주거나, 일상의 사물들을 가지고 무한반복을 해서 '크다 작다' 개념을 가르쳤다고 했다. 부모가 수행해야하는 이 엄청난 노동에 나는 어질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돌잡이**을 들이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반복했다. 아이는 눈만 끔뻑끔뻑하며 나를 바라봤다. 나의 열의가 가닿지 않는 그 눈을 보자, 깊은 곳에서 다시금 무언가 흘러나왔다. '내가 일찍 낳아서……'
아이를 낳은 후 반복적으로 받아온 메시지는 이것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는 모든 과정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엄마의 탓이거나, 혹은 엄마의 탓이 아니더라도 엄마에게 직접적 책임이 있다. 시대와 사회에 따라, 아이의 특성에 따라, 문제라 일컬어지는 것이 아무리 다양하더라도." 이 사회적 압력의 부당함을 알았다고 해서, 죄책감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가 아플(장애를 가질) 수 있다'에서 '나 때문에'로 이어지는 이 사고의 회로는 너무나 빨랐다.
나의 좌절과 죄책감, 열의와 노동이 무색하게, 일주일 후 나온 발달 검사 결과는 정상이었다.
죄책감을 주는 공간은 또 있었다. 주변에서는 틈 날 때마다 말했다.
“얼마나 소중한 아이냐. 초심 잃지 말고 아이만 잘 봐라.”
나 역시 ’힘들게 온 아이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내면의 목소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내가 감히 육아의 힘듦을 토로하다니, 무엄하도다."
그러나 육아의 '초심'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과제였다. 남편은 직장과 학업으로 늘 바쁘고 지쳐있었다. 좁은 아파트에 갇혀 홀로 24시간 아이를 상대하는 일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공들여 만든 반찬을 아이가 촉감놀이하듯 문지르고 있을 때, 길거리에 누워 '안아줘' 외치며 움직이지 않을 때, 딱 15분만 자면 살 것 같은데 일어나라며 나를 흔들어 깨울 때, 하루치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했는데 아직 저녁분의 육아가 남았을 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아이를 전적으로 책임지는 존재가 나 하나 뿐이라는 사실, 내가 굶기거나 못살게 굴어도 아는 사람 하나 없을 거라는 사실을 두려움 속에 곱씹었다.
힘들게 내 곁에 온 아이에게 배부른 투정을 하는 게 아닌가?
영국의 소아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위니캇의 '충분히 좋은 엄마' 개념을 만난 건 그때쯤이었다. 위니캇은 말한다. '어머니는 처음부터 유아를 증오한다.개인적인 삶을 방해하고, 다른 일에 몰두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는 등의 이유로, 병리적이거나 불완전하거나 혹은 사악해서가 아니라 악의 없이 자신의 아기를 증오한다'.
중요한 것은, 어머니가 자신의 유아를 향한 증오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어머니는 증오를 견디고, 증오를 생각하면서도, 증오를 실행하지 않는 '객관적인 증오의 능력'을 가질 수 있다. '만일 어머니가 자신의 증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아기를 적절하게 증오할 수 없다면 자기학대에 사로잡히게 된다.'
좋은 어머니에 대한 이상이 공고한 상태에서는, 어머니가 자신의 증오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 산후우울증과 관련한 많은 연구들은 산후우울증의 주된 원인이 '좋은' 어머니에 대한 기대와 경험 사이의 모순에서 온다고 말한다. '좋은' 어머니란 누구인가. 좋은 어머니 담론은 1) 좋은 어머니가 누구인가, 2) 어머니 노릇을 어떻게 하는가, 3) 어머니가 어떻게 느껴야 하는가를 규정해왔다. 즉, 좋은 어머니는 1) 중산층 이상으로 아이에게 돈과 시간을 할애할 수 있고, 2) 무조건적 사랑과 희생으로 아이에게 헌신하며, 3) 행복함을 느끼는 어머니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 아이를 낳고 수없이 들은 말이다. 엄마 자신의 행복이 먼저라는, 언뜻 전복적으로 보이는 이 말은 또다른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른둥이 관련 연구들은 엄마의 행복감, 자아효능감이 이른둥이의 발달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이를 위해서, 나는 행복해야 했다. 언제나 행복하고 쾌활하고 명랑한 엄마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는 일은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아니, 아이를 향한 사랑과 걱정, 연민과 분노, 좌절, 실망, 무기력을 동시에 느끼며, 끊임없이 양가적 감정을 마주하는 일이었다.
아이의 눈으로 세상의 빛나는 것들을 보는 순간은 눈부셨고, 동시에 작은 존재가 만들어내는 수많은 노동(삼시세끼 차리고 먹이고 치우기, 놀아주기, 씻기기, 재우기, 철마다 아이 옷과 필요한 물품 사기, 처분하기 등)은 힘에 부쳤다. 효율이나 성과와 다르게 돌아가는 아이와의 시간은 평화로웠지만, 정체되어 있었다. 누군가 보호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엄청난 집중력과 동시에 폭력성('우리 애 건들면 누구도 가만두지 않을거야!')을 가르쳐줬다. 내 힘만으로 아이를 보호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도. 나는 아이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 사이에서 끝없이 조율하고 분열하면서, 종종 독립적 개인으로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몸서리쳤다. 그러면서도 아이와 함께, 아이를 위해, 세상의 무언가에 맞설 수 있겠다고 예감했다.
'초심'은 잃으라고 있는 것이었고, 양가적 감정은 아이와 나와의 창조적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표지였다. 나는 행복하고 명랑한 엄마를 연기하기보다, 아이를 향한 양가적 감정을 인식하고, 그 속에서 다른 길을 만들어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