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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쓸쓸 Oct 17. 2021

한 조각 내 시간을 찾아, 육퇴 후 몸을 일으키는 이유

<모성애의 발명> 읽기 

<모성애의 발명>,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 지음, 알마, 2014


아이를 낳고 페미니스트가 된 이들의 익숙한 서사. 좋은 교육을 받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며 승승장구하다가, 출산 육아를 겪으며 여성으로서의 삶을 자각하게 되는? 쓰다보니 <빨래하는 페미니즘>의 스테퍼니 스탈이 떠오른다.


어쨌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런 서사와 거리가 멀다. 성공한 사회인과는 거리가 멀었고, 틈만 나면 퇴사와 탈주를 꿈꾸었다. 게다가 간절히 아이를 원했고 오랜 난임 기간을 거쳤다. 1.63키로로 태어난 아이가 ‘건강하기만 하면 바랄 게 없겠다’ 빌었던 때, 나의 인생 계획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그런데도 아이를 낳은 후 ‘내 시간! 내 인생!’을 신처럼 모시게 된다. 틈만 나면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카페로 도망가거나, 육퇴 후에 피곤한 몸을 일으킨다. 지렁이같은 글씨로 일기라도 끄적이고, 스마트폰으로 연예 뉴스라도 보고, 몇개월간 한장도 넘기지 못한 책을 표지라도 만져본다. 육퇴 후에야 간신히 얻은 혼자만의 시간, 이대로 잘 순 없어. 감기는 눈을 억지로 떠 스마트폰에 고정한다. 대단한 걸 하는 것도 아니면서, 나 왜이렇게 혼자만의 시간이 갈급하지? ‘한 조각의 자기 인생’이 도대체 뭐길래.



<모성애의 발명>에 따르면 ‘한 조각의 자기 인생’ 역시 근대의 발명품이다. 전통적 구속이 해체된 자리에 인생행로의 선택의 기회가 커지며, 새로운 도전과 강제가 나타난다. '인생은 더이상... '놀라운 하느님의 선물'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지켜야 할 개인의 소유물이다. 나아가 인생은 스스로 만들어야할 과제, 개인적인 기획이 된다.'(47쪽)


이 책의 후반부에 저자는 말한다. 근대 사회의 목표에는 '목적의식적으로 인생행로를 설계하고 기회를 폭넓게 이용하며 장애물을 예측하여 피하는 것'(169쪽)이 포함되며, 이 근대적 자아 기획은 어머니가 되는 것과 함께 가기 힘들다. 


 ‘타인을 위한 삶은 몰아적인 사고와 행동을 요구한다. 그에 반해 근대 사회의 감추어진 교육 계획에는 목적의식적으로 인생행로를 설계하고 기회를 폭넓게 이용하며 장애물을 예측하여 피하는 것이 포함된다. 이런 기준에서 아이가 명백한 장애물이 되고 가능성을 현저히 제한하는데 어떻게 어머니가 되기로 결정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갈등이며, 이는 개별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근대사회의 문제다.' (169쪽)


“모성애와 자기만의 삶, 모두 근대의 모순된 발명품. 양립 불가 땅땅!” 반박 불가능한 문장 앞에서 나는 낙담했다. 엄마가 된 후의 혼란을 나는 ‘아이 어린이집에만 보내면’ 이라는 상상으로 잠재우곤 했다. 아이 어린이집에만 가면, 내 시간만 생기면, 그런 상상으로 견뎠다. 그러나 모성애와 자기만의 삶 사이의 갈등은 그렇게 쉽게 봉합되는 것이 아니었다. ‘교육과 노동시장부터 의료보험과 노후 대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차원을 포괄하는 복잡한 좌표계의 중심이 되는 자아’와 엄마로서의 ‘자아 포기’는 함께 하기 힘들다.


하지만 위로도 있었다. 아이를 간절히 원해 힘겹게 낳았지만 나만의 인생을 포기하지 못하는 나의 분열은 나만의 것이 아니며, 나의 탓이 아니다. ‘나 왜이러지?’ 의아해하거나 죄책감 가질 일이 아니다.



<모성애의 발명>에서 아쉬운 점. '한 조각의 자기 인생'은 직업과 일을 중심으로 정의된다. ‘대부분 사람들에게 인생 설계의 주요한 제도적 벡터는 노동시장 및 노동시장과 맺는 관계다. 자신의 인생 계획을 짜는 데서 근본이 되는 것은 자신의 직업이다.'(46쪽)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직업, 승진, 자기계발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내가 가진 갈급함은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직업활동은 돈(=돈이 주는 독립성과 영향력)과 새로운 형태의 자의식을 가져다주지만, 자기소외를 가져오기도 한다. 당장 나에겐 일보다도 멍때릴 시간이, 책을 쌓아놓고 차를 마실 서재가, 나 자신으로서 맺는 관계가 갈급하다. 


이 책은 남녀평등, 동반자관계, 여성해방을 결론으로 제시하지만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다. 아이의 존재는 직업, 성취, 자기계발 속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을 드러내준다. 우리 모두 돌봄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살아왔음을, '효율성과 업적, 정확성과 계산가능성, 질서와 조직 같은 기술과학문명의 원리'(150쪽)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깨닫게 한다. 돌봄, 관계가 사회를 조직하는 원리가 될 수는 없을까. 그런 꿈을 꾸면서, 지금의 분열을 견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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