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쓸쓸 Oct 17. 2021

아이가 '만들어질 수 있는 존재'라는건 희망일까 덫일까

<모성애의 발명> 읽기

<모성애의 발명>,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 지음, 알마, 2014


아이를 조산하고 오랜 시간 나는 발달 걱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발달장애’라는,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단어가 어느샌가 다가와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재활의학과 교수는 이른둥이의 발달장애 가능성을 언급하며 ‘엄마가 잘 놀아주세요’, ‘아이의 환경적 자극이 중요해요’, ‘말 많이 걸어주세요’라고만 말했다. 왜 엄마인 나한테만? 불만을 가질 여유도 없었다. 내가 노력하면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다니까 노력해보자. 어디를 갈까, 어떻게 놀아줄까, 계속 말을 걸어야 해. 개월별 발달검사지를 출력해서 연습해보자. 육아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성공이라는 목표를 위해 양육자가 신중하게 도입하고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활동’(147쪽)이었다.


목적의식적으로 프로그래밍한 육아는 피곤할 수 밖에 없었다. 육아가 피곤해 금방 지쳤고, 내가 지친 게 티나면 아이에게 나쁜 영향이 갈까 걱정했고, 악순환이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런 육아를 그만두었다.


두돌이 지난 지금, 아이는 큰 걱정거리 없이 자라고 있다. 내가 잘 키워서일까? 주위 이른둥이 친구들을 보면, 만삭아와 다름없이 평범하게 자라는 아이도, 여러 치료를 받아야 하는 아이도 있다. 엄마들 대부분 육아에 최선을 다했지만 아이들의 예후는 다르다. 2년 전 우리 중 아무도 아이의 예후를 확신할 수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출처: 병원신문 (http://www.kh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9949)


<모성애의 발명>에 따르면, 1950-60년대 이후, 의학과 심리학과 교육학의 발전으로 아이는 ‘만들어질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과학 이론의 힘을 빌려 아이의 결함 교정, 소질 계발을 하는 것이 지상과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이가 ‘만들어질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건 희망일까 덫일까.


아이가 ‘만들어질 수 있는 존재’라는 건 나와 다른 이른둥이 엄마들에게 희망이었다. 조산으로 인한 여러 장애 가능성을 만회할 수 있는. 그러나 이 희망은 수많은 정보를 찾고 활용해야한다는 부담과 노동을 양산했다. 엄마에게만. 의사는 ‘엄마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할 뿐이었고, 사회는 발달장애 혹은 발달장애 고위험군 아이를 위한 지원 체계를 충분히 만들지 않았다. 또한 아이가 ‘만들어질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건, 결함이나 장애를 인정하기보다 교정해야할 대상으로만 바라보게 했다. 아이가 ‘만들어질 수 있는 존재’라는 건 희망이기도 했지만, 덫이기도 했던 것이다.


장애에 대한 걱정이 없는 경우라도 ‘아이는 만들어질 수 있는 존재’라는 부담과 노동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나의 육아노동이 결함 교정의 측면에 맞춰져있었다면, 평범한 육아의 경우 소질 계발의 측면에 더 맞춰져있다. 아이가 어릴수록, 아이의 소질은 무궁무진하며 어떻게 계발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사회는 끊임없이 압박한다. 그러니 전집을 들여야하나, 새로운 교구를 사야하나, 엄마표 놀이를 검색해볼까, 정보노동이 끊이지 않는다.


이 피곤함을 무릅쓰는 이유는 단 하나, ‘현대사회가 사회적 유동성을 근본원리로 하는 업적 사회’(148쪽)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엄격하게 경계가 정해진 동시에 안전이 보장되었다면, 이제는 신분과 계급의 제약이 약해진 만큼 교육과 지원이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노동’의 한 부분으로서 더욱 중요해졌다.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 사회에서 자기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압박감이 필연적으로 아이들의 방안까지 전파된다. 육아는 상승에 대한 바람과 하강의 위협 사이에 꼼짝없이 매여있다. (148쪽)


아이를 낳기 전, 나는 아이의 성취에 관심 가지기보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이른둥이를 낳고 육아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고, 나는 (‘남들보다 뛰어나게’가 아니라, ‘남들만큼’이 목표였지만) 아이의 성취에 전전긍긍하는 엄마였다. 최선의 육아로 내 아이를 힘껏 만들어야 한다는 희망과 덫, 그 속에 옴싹달싹 못했던 시간이 떠오른다. 아이에 대한 걱정, 욕심을 버릴 수 없도록 만든 사회의 민낯을 담담히 응시하는 지금이 좋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