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아파트 옆 단지에 사는 한 엄마의 이야기
아이가 돌이 될 무렵부터 4년간 살았던 집은 ‘스쿨 뷰’, 12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초등학교 운동장이 훤히 내다보이는 곳이었다. 이 집을 처음 봤을 때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도 이 뷰였다. 이차선 도로를 건너 초등학교와 병설유치원, 근린공원이 내려다보이는,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피구를 하거나 옹기종기 모여 노는 모습이 오래된 동네의 키 큰 나무들과 어우러진 풍경.
아이의 지독한 감기로 집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못하던 어느 날. 집 앞 초등학교가 떠들썩했다. 쿵짝쿵짝 음악 소리와 호루라기 소리, “와”하는 함성 소리…, 운동회가 시작되나 보다! 심심했던 아이와 나는 베란다로 구경을 나갔다. 한 남자 선생님이 요란스레 호루라기를 불며 학년별로 학생을 정렬시키고 있었다. “자, 1학년 모이세요! 자, 다음 2학년, 3학년…” 뭔가 이상했다. 한 학년이라고 모인 아이들의 수가 예상보다 너무 적었다. 이게 다라고? 한 반 아니고 이게 한 학년이라고?
2023년 현재 이 학교의 재학생 수는 105명. 1학년과 5학년을 제외하곤 학년당 1학급씩 있고, 학급 평균 학생수는 11.7명이다(서울시 초등학교의 학급 평균 학생수는 21.3명이다). 이 초등학교의 학생수가 이렇게 적은 이유. 내가 살던 아파트의 부모들은 아이를 이 초등학교에 보내길 꺼린다. 임대아파트 아이들이 이 학교에 배정받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아이가 초등학교 가기 전에 이사를 가고, 위장전입을 해서라도 근처 다른 초등학교에 보내기도 한다(걸어서 10분 거리의 다른 초등학교 재학생 수는 이 학교의 5배에 달한다). 임대아파트에는 학령기 인구가 줄고, 임대아파트 옆 단지에는 학령기 인구가 빠져나가니, 이대로라면 폐교가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JTBC 예능 프로그램 <속사정쌀롱>에 “아파트 종류별로 줄 세운 초등학교”라는 주제의 회차가 방영된 후,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임대 아파트 차별에 대한 다양한 댓글이 달렸다. 사는 곳으로 아이들을 차별하는 천박함을 개탄하기도 하고, 차별을 할 ‘자격’에 대해 따져 묻기도(“애매하게 가진 애들이 더 구분 짓더라. 너네 아파트가 뭐 15억, 20억이라도 되냐?”) 하고, 임대 애들이 ‘거칠고’, ‘엇나갈 가능성이 많아서’ ‘위험하다’고도 하고, ‘제 새끼 일’이 되면 당신들 모두 신경쓰일 거라고도 했다. 나는 이 모든 댓글들을 남 일 보듯 할 수 없었다. 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시민이고 싶으면서도, 아이와 임대 단지 놀이터를 갈 때면 ‘놀이터 미끄럼틀에 뒹구는 이 맥주캔과 과자봉지는 뭐야….’ 읊조리며 아이의 손을 잡아 끌던 엄마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당신에게 바칩니다.” 특권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한 강남 아파트 분양 광고 문구처럼, 오늘날 주거지는 계급을 촘촘하게 나누기 위한 도구가 되었다. 섬뜩한 것은, 계급으로 주거지를 분리하려는 욕망이 자신의 자녀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작동된다는 것이다. ‘아이를 어디서 키울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성인이 홀로 혹은 둘이 살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려할 것이 많다. 도보로 갈 수 있는 공원이나 놀이터가 있어야 하고, 다세대 주택가의 골목처럼 보도와 차도가 분리되지 않은 길은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고, 기왕이면 ‘초품아’에다 초등학교 구성원의 환경이 ‘균질적’이어야 좋고…. 아이를 키우기 좋은 환경은 대부분 집값이 비싼 동네에 국한되고, 아이를 안전하게 키우려는 소망은 나와 다른 존재들을 ‘위험 요소’와 ‘불순 분자’로 취급하고 성벽을 쌓으려는 욕구로 쉽게 치환된다.
영국에서 보육사로 일한 경험을 다룬 브래디 미카코의 <아이들의 계급 투쟁>에는 인상 깊은 일화가 있다. 그가 일하던 중산층 동네 어린이집의 부모들은 하층 계급의 억양과 말투, 차림을 한, 말하자면 “밑바닥 냄새를 풍기는” 교사를 각종 유언비어를 만들어 쫓아낸다. 보육비 보조 인정을 받는 하층 계급 유아들을 자신의 아이와 같은 시설에서 보육하는 것이 두려워, 하층 계급 유아 입소를 거부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브래디 미카코는 영국 중산층 부모가 정치적 올바름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이는 외국인 차별에는 민감하지만, 자국민 하층 계급에 대한 차별에는 무감각한 현실을 소셜 레이시즘(social racism)이라고 꼬집은 바 있다.
이 소셜 레이시즘이 그 어느 때보다 가혹해지는 시대, 임대에 아파트에 살 정도는 아니면서 임대 아파트와 멀리 떨어져 ‘캐슬’을 구축할 수 있을 정도도 아닌, 애매한 계급의 나는 때때로 나의 모성 역시 가혹해질 수 있다는 것에 놀란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작고 여린 존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과정이 되기도, 자신의 가족 바깥에 높은 울타리를 치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무겁다.
몇 달전 나는 이사를 했다. 살던 집의 계약이 만료되면서 아이의 어린이집 근처로 이사했지만, 이전 집과 그리 멀지는 않다. 사십 평생의 대부분을 살았고 살고 있는 서울시 강서구, 이 곳은 한 특수학교 설립을 둘러싼 갈등(서울 강서구의 한 임대 아파트 옆 초등학교를 폐교하면서 그 부지에 특수학교를 짓겠다고 하자, 근처 신축 아파트 주민들이 반대하며 많은 갈등을 빚었다)를 다룬 다큐 <학교 가는 길>의 배경이고, 임대 아파트와 민간 아파트 사이의 보이지 않는 차별과 고립이 여전히 진행중인 곳이다. “땅 위에 발 딛고 사는 우리가 해야할 일은 이 단절을 조금이라도, 단 1밀리미터씩이라도 좁히는 것이다”라는 브래디 미카코의 문장에 밑줄을 긋는 밤, 옆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아이는 더 넓은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