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영파냐 하정훈, 조선미파냐'는 질문에 대해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 150호(2023 11-12)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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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는 마음 읽어주라더니?
“부모는 모두 좋은 부모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아이를 키우면 되는데 잘 키우고 싶어하는 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지난 9월 tvN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한 조선미 아주대학교 정신의학과 교수의 말이다. 조선미 교수는 현실에서의 훈육 중심 육아를 주장하는 전문가로 최근 인기를 얻고 있다. 아이 중심이 아니라 부모 중심의 전통 육아를 강조하는 하정훈 소아과의사 역시 최근 급부상한 육아 전문가 중 한 명이다. “부모가 잘못 키운 금쪽이”(조선미), “오은영 육아 함부로 따라하면 안 되는 이유”(하정훈) 등 두 사람이 출연한 유튜브 클립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두 사람은 오은영 박사의 육아법이 비판받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유튜브 클립의 댓글이 이 전문가들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차는 것을 지켜보며 읊조렸다. ‘오은영의 시대가 가고, 조선미, 하정훈의 시대가 오나?’
불과 1~2년 전까지만 해도 육아법의 대세는 ‘마음 읽어주기’였다. 오은영 박사는 아이의 말과 행동에 대해 우선 “그랬구나” 수긍한 후에 교육해야 할 바를 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11년에 출간한 최성애‧존 가트맨 박사의 책 『내 아이를 위한 감정코칭』 또한 아이의 마음에 공감하면서도 행동에 한계를 지어주어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공감하기와 한계 지어주기 중 먼저 해야 할 일은 아이의 감정에 공감하기다.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그 감정이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할 때,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힘도 생긴다는 것이다. 많은 국내 저자들의 육아서가 이에 기반해 공감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은 공감능력”(윤옥희 저 『초등 공감 수업』), “엄마의 공감이 아이의 평생 행복을 결정한다!” (권수영 저 『아이 마음이 이런 줄 알았더라면』)
마음 읽어주기와 같은 공감 중심 육아법의 추락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복잡하다. 공감 중심의 육아법이 성행하던 시기, “그랬구나”로 시작하는 대화법은 수학 공식처럼 견고했고, “안 돼”, “하지 마” 등의 부정적인 단어를 사용하면 몰지각한 엄마라는 시선을 맞닥뜨렸다. 나는 이러한 육아문화가 육아를 지나치게 어렵고 복잡하게 만든다고 투덜댔다. 그런데 갑자기 모든 게 변했다.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는 양육자는 이제 ‘진상 부모’가 되어버린 것이다! 반가우면서도 당혹스러웠다. ‘언제는 마음 읽어주라더니 이제 와서 왜 이래?’
공감 육아법 뒤에 있는 ‘자존감 신화’
육아법이 확확 바뀌는 2023년의 대한민국 모습에서, 1950년대의 미국이 겹쳐진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미국에는 행동주의가 유행하며 엄격하고 과학적인 육아방식이 선호되었다. 2차 세계대전 후에는 많은 것이 변했다. 전쟁으로 인한 피로와 상처 속에서, 관대한 육아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개인의 자유가 권장되었고, 행동주의, 우생학, 애국적인 순종은 위험한 것이 되었다. 섀리 엘 서러가 『어머니의 신화』에서 인용한 한 엄마의 깨달음처럼, 이 변화는 굉장히 빠르게 일어났다. “나는 아이들에게 신선한 야채를 주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장남인 피터가 자기 그릇을 깨끗이 비우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둘째 아들인 다니엘은 자기 그릇에 있는 음식을 반드시 먹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맛은 보아야 했다. 그리고 막내 빌리는 내가 관계되어 있는 한, 자신이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1950년대 미국의 육아법 변화 뒤에 전쟁의 상처가 있다면, 공감 중심 육아법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는 자존감이라는 신화를 지적하고 싶다. 우리 시대에 자존감은 또 하나의 종교다. 수많은 문제들은 자존감이라는 어휘를 경유해 도착한다. 교사의 자존감이 떨어진 것은 교실 전체의 문제이지만, 교사가 훈육을 하는 것 또한 아이의 자존감을 건드는 일이라 금기사항이다. 치아교정과 틱 장애 치료는 성장기 자녀의 자존감을 위해 꼭 필요하며, 학교와 도서관에서도 아동의 자존감을 함양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연다. 오늘날 자존감은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 요소이며,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가’만큼 중요한 문제는 없다.
그러나 나 자신에 대한 느낌은 유동적인 것이기에 근본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다. 자존감을 지키는 일이 끝없는 숙제처럼 반복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먼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 아이를 전학 보내야 할 때, 다른 아이들처럼 생일 파티를 해주지 못했을 때, 아이가 키가 작은 것 때문에 의기소침해할 때, 야근이 잦아 아이의 얼굴을 보기 힘들 때, 엄마의 귓가에 맴도는 말들도 이것이다. ‘아이의 자존감, 긍정적 자아상, 정서적 안정….’ 아이의 성적에서 자유로운 엄마라도 여기서까지 쿨하기는 힘들다.
저널리스트 제시 싱걸이 『손쉬운 해결책』에서 지적했듯 자존감 신화는 “각자가 안고 있는 깊은 정신적 상처를 해결해야 한다는 믿음”, 즉 대중 심리학의 유행과 맥을 같이 한다. 마음 읽어주기가 비판을 받고 있지만, 자존감과 긍정적 자아상이 중시되고 대중 심리학·상담·명상 등에서 심리적 도움을 얻고자 하는 치유 문화는 더욱 번성하는 현실 속에서, 양육자의 혼란은 계속된다.
전문가에 대한 찬양과 양육자에 대한 비난 사이에서
이 혼란의 틈새를, ‘국민 육아 멘토’로 손꼽히던 오은영 박사 대신 또 다른 전문가의 목소리가 채우고 있다. 쉬운 육아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들이 부상하는 것에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조선미 교수는 “그냥 키우면 되는데 잘 키우려고 하는 게 문제”라고 하면서도 아이 앞에서 해서는 안 되는 말, 공공장소에서 효과적으로 훈육하는 팁 등을 가르친다. 하정훈 원장은 “부모 위주로 살면서 ‘자동 육아’로 키우면 어려울 것 없다”고 하면서도 왜 육아가 어려워졌는지 그 원인을 공감 육아법에서만 찾는다. 이들 역시 전문가의 권위를 빌어 구체적인 육아의 기술을 제시하는 데 여념이 없으면서도, 육아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에는 돌봄을 여성의 일로 국한하는 가부장제, 긴 노동시간, 공동체의 축소, 입시 경쟁, 성공 강박 등이 얽혀있다는 사실을 침묵한다.
대세 육아법이 변하는 과정에서 이 육아법에 따르지 않는 양육자, 특히 대부분 주양육자로 아이를 돌보는 엄마는 비난에 시달리기 쉽다. 1940년대, 전쟁의 시기에 미국에서 가장 비난받는 양육자는 ‘과보호하는’ 엄마였다. 엄마의 과보호가 미래의 병사들을 지나치게 떠받들어 부적합한 군인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애착이론이 유행하기 시작하자, ‘자식을 남의 손에 맡기는’ 엄마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쯤 되면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온다. “어쩌라고!” 내가 주목하고 싶은 사실은, 이러한 비난이 대부분 유명한 육아 전문가들의 발언을 인용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나의 아이가 영유아로 자라나는 무렵, 내가 가장 많이 듣던 말도 이것이다. “오은영 박사님이 그러는데….”
물론 양육자는 사회적으로 유행하는 육아법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다. 아이라는 고유한 존재와 소통하면서 고유한 소통 방식을 만들어가는, 그리고 만들어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또한 최근 주목받고 있는 ‘몬스터 페어런츠’(monster parents, 일본, 홍콩 등에서 자기 자녀의 이익만 생각해 악성 민원을 하는 부모를 일컫는 말) 현상처럼, 양육자가 교실 공동체를 위협하는 경우에는 합당한 비판이 필요하다. 하지만 과거 ‘나쁜’ 부모를 일컬었던 ‘헬리콥터 부모’, ‘잔디깎기 부모’, ‘돼지 엄마’ 등의 용어가 그러하듯, ‘몬스터 페어런츠’ 역시 “극심한 학벌 경쟁,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인한 소비자 중심주의와 성과주의, 여성이 독박육아를 담당하는 가부장제”(김현수, 『괴물 부모의 탄생』) 등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아니, 이러한 사회적 맥락이 점점 더 과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용어이기도 하다. ‘몬스터 페어런츠’를 부모의 인성 문제로 치환하기보다, 이러한 부모를 만드는 사회적 맥락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공감 육아 대신 현실 육아‧전통 육아가 떠오르는 이 급변의 시기는, 시대에 따라 주목받는 육아법은 달라지며 육아 전문가의 발언 역시 시대를 초월한 진리가 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 혼란의 시대에 어떤 양육자가 되어야 할까? 대세와 무관하게 ‘중심’을 잡고 실천하는 양육자가 되기를 원하지만, 그 '중심'이라는 것 역시 사회적 상상력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대세 육아법도, 그와 반대되는 대안적인 육아법도, 사회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은영파냐 혹은 하정훈·조선미파냐, 공감 육아냐 혹은 현실 육아냐 하는 질문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저 육아가 더 편하고 즐거운 일이기를 바란다. 동시에 아이는 저절로 크는 것이고 육아는 원래 쉬운 일인데 “요즘 엄마들이 문제”라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다. 누군가를 돌보는 과정에서의 보이지 않는 노동들이 폄하되지 않으면서도, 육아를 과열되고 복잡하게 만드는 사회적 요인들을 거둬내는 일에 함께 머리 맞댈 수 있기를 바란다. 그 과정에서 전문가의 목소리보다는 평범하게 육아하는 평범한 양육자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유통되기를 바란다. 한 젊은 교사의 죽음으로 시작된 사회적 논의가, 다른 육아 전문가에 대한 찬양이나 개별 양육자에 대한 비난으로만 끝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아래 두 글을 수정해 실었습니다.
https://brunch.co.kr/@iskii/52
https://brunch.co.kr/@iskii/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