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째 별이와 산책을 다니고 있다. 처음에는 집 주변과 뒷산으로 다니다가 점점 동선이 길어졌다. 날씨가 좋은 계절에는 옆 옆 동네까지 왕복 12km를 걸어 다녔다. 시골이지만 관광지 근처라 조금만 나서면 하천 주변으로 산책길과 자전거 도로가 잘 조성된 곳이다. 낮 시간 대부분을 앉아서 혹은 누워서 시간을 보내던 내가 '걷는 사람'으로 거듭났다. 걷고 또 걷다 보면 어느새 멀찌감치 와있어서 '조상님들은 이렇게 짚신 몇 짝 꿰어 들고 한양까지 갔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들어서면서 "별이 산책 갔다 왔어 "외치면 "그래? 별이가 너 운동시킨 것 같은데"하는 남편의 대답이 돌아오고는 했다. 뜨끔. 별 의미 없이 사용했던 '산책시켜준다'라는 말에 깃든 오만함에 몸서리가 쳐진다. 요즘은 '운동 간다'라고 한다.
'걷기 운동'을 하는 동안 둘만의 루틴이 생겼다. 먼저 길을 나서기 전에 뒷산에서 배변을 위해 5분 정도 목줄을 풀어준다. 별이가 줄 없이 뛰어다니고 실컷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시간이다. "별이 간식!"외치면 어김없이 내 앞에 나타났다. 나중에는 간식이 없어도 돌아왔기 때문에 우리가 '환상의 짝꿍'같다고 느껴졌다. 1년이 넘도록 조금 늦게 돌아온 적은 있어도 언제나 다시 돌아왔기 때문에 다음 산책을 이어가는데 문제가 생긴 적은 없었다. 배려와 믿음이 굳건한 사이. 내가 바라는 가족의 모습니다.
그러고 나서 동네 아랫길로 내려간다. 골목을 막 나서자마자 매번 인사하는 별이의 친구가 있다. 처음에 아랫집 개는 담과 대문에 막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소리 높여 짖어댔다. 그렇게 1년 정도 짖더니 언제부터인지 담장 쪽에 얼기설기 얽혀 꽤 구멍이 큰 철조망까지 다가와 우리를 보면서 짖기 시작했다. 별이는 다른 개들과 마주쳐도 낮게 으르렁거리기나 했지 한 번도 왕왕 짖은 적이 없다. 아랫집 개를 보고도 짖지 않았고, 오히려 냄새를 맡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아랫집 개도 조금씩 마음을 열더니 나중에는 철조망 틈으로 서로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아랫집 개는 철조망 아래 흙을 파헤치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넓어지는 틈으로 둘은 매일 인사를 나눴다. 이때만 해도 아랫집 개가 암컷인지 수컷인지 몰랐고, 그저 털이 덥수룩해서 우리 가족은 '삽사리'라는 별칭을 붙여줬다.
어느 날 삽사리네 집이 담과 대문을 공사하게 되었다. 둘이 인사를 나누던 철조망은 사라지고 색이 예쁜 목재가 담을 대신했다. 대문도 새로 달면서 삽사리와 별이는 전보다 훨씬 넓은 틈으로 인사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다만 틈이 넓어서 삽사리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장치까지 따로 설치되어있었다. 둘이 인사하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고, 나는 한참을 남의 집 대문 앞에서 서있어야 했다. 서로의 냄새를 맡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어찌나 애틋한지 로미오와 줄리엣이 따로 없었다. (삽사리는 수컷이었다)
강아지판 로미오와 줄리엣
한여름에는 뒷산에 풀이 무릎 높이까지 자라는데 뱀이 많아서 잘 가지 않게 되었고, 차선책으로 선택한 옆동네로 향하는 길도 온통 모기 천지라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나서는 당산나무 건너에 새로 생긴 마을 쪽으로 산책을 다니기 시작했다. 이 동네는 전원주택이 꽤 여러 가구 들어와서 반려견들도 많고 산책하는 개엄마 개아빠도 많이 만난다. 대부분 마당에서 키우는지 중 대형견들이 많았고, 마주칠 때마다 개들은 서로 으르렁거리거나 짖거나 하기는 했지만 길에 뿌려놓은 서로의 냄새를 맡느라 별이가 멈추는 일이 잦아졌다. 참 희한한 게 매일 본다고 해도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으면 개들도 친해지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다. 사람이랑 어찌나 비슷한지 오랫동안 같은 직장에 다녀도 따로 시간을 내거나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가벼운 목례만 하는 동료와 친해지기가 쉽지 않은 법이니까 말이다.
길을 지나다니다 보면 집집마다 담장 안쪽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가끔 대문 틈으로 인사를 나누는 별이의 친구들이 몇 생겼다. 한 번이라도 만나거나 냄새를 맡았다면 다음날 그 길을 지나칠 때 귀신처럼 다시 그곳에 들러 친구를 부르거나 냄새를 맡았다. 비록 서넛이지만 새로 친구를 사귈 때마다 루틴이 추가되니 적정 수준에서 인사하고 가던 길을 재촉하는 요령이 필요했다.
사건은 지난달에 일어났다. 별이의 베프 삽사리가 집을 탈출했다. 삽사리는 생각보다 더 날씬했다. 대문 틈으로 기어 나와 마치 우리 집에 사는 것처럼 별이 옆에 붙어있기 시작한 것이다. 장대로 겁을 주기도 하고 소리도 쳐서 쫓아보았지만 삽사리는 어떻게든 별이 옆에 와있었다. 우리가 마당에 있으면 멀리 돌아 산을 통해 내려왔고, 길을 타고 돌아내려 와 집 뒤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별이가 암컷이라 우리 가족은 삽사리의 등장에 신경이 예민해졌다. 아랫집에서 우리가 삽사리 쫓는 소리를 들었는지 삽사리를 묶어두셨다. 그런데 묶여있는 내내 짖어대는 바람에 온 동네에 개 짖는 소리가 쉴 틈 없이 울려 퍼졌다. 그런데 문제는 밤새도록 짖어대는 삽사리에게만 있는 게 아니었다.
또 다른 동네 개가 등장한 것이다. 별이는 평소에 잘 짖지 않는데 밤만 되면 짖어서 나가보았더니 대문 간에 낯선 개가 나타났다. 그 개는 건너 마을에 사는 레트리버인데 며칠을 밤마다 집 근처에서 서성댔다. 시아버지랑 내가 빗자루를 휘둘렀지만 새벽 내내 지킬 수는 없는 상황이라 밤늦은 시간에는 어쩔 수 없었는데 웃긴 게 며칠 동안 매어있다가 풀려난 삽사리가 우리집으로 들어와 그 개를 향해 짖어대는 것이다. 카랑카랑한 소리로 어찌나 크게 짖는지 별이에게 접근하는 다른 개를 쫓아내는 역할을 삽사리가 했다. 문제는 별이가 삽사리를 너무나 좋아했다. 1년 넘게 담너머로 쌓은 우정은 사랑이 된 것 같았다. 새벽마다 둘이 무슨 일 내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고, 자다 깨서 삽사리를 쫓아내기도 했지만 잠시뿐이었다. 이제 둘의 '사랑과 우정 스토리'는 내손을 떠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