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집 삽사리는 별이 곁에서 떠날 생각을 안 했고, 밤에는보디가드 역할까지 했다. 아랫집 아저씨 아주머니와 이야기도 나누었다. 묶여있는 내내 짖어대는 바람에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고 하며, 사방이 막혀있는데 대체 어디로 올라가는지 모르겠다고 읍소하셨다. 시아버지와 나는 둘이 인연인가 보다면서 웃었지만 내심 걱정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양쪽 집 모두 둘을 연인 사이로 공식화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삽사리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삽사리의 이름은 '마초'였다. 촉의 장수 마초(馬超)인지 스페인의 마초(macho)인지 모르겠으나 이러나저러나 이름에서부터 남자다움이 뿜어져 나왔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둘을 떼어놓으려고 했을 때는 마초의 덥수룩한 털이 예뻐 보이지 않았다. 이게 딸 가진 부모 마음일까. 누구를 데려와도 마음에 차지 않고, 귀한 딸 고생시킬 것만 같은 의심쩍은 마음. 근심과 걱정을 거두고 사위로 받아들이고 나면 새로 맞은 귀한 아들이 되는 그 마음 말이다. 둘 사이를 인정하고 보니 마초가 복슬복슬 하니 매력 둥이로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마초!"하고 부르면 이게 웬일인가 싶은지 왼쪽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그게 귀여워서 자꾸만 이름을 불러보았다. 오가면서 마초에게 간식을 하나씩 나눠주고는 했는데 그래서인지 마초는 금세 나를 따랐다.
뒷산으로 산책 갈 때 "마초 같이 가자!" 했더니 신 나서 따라오는데 귀여운 인형 같아서 강아지 둘을 산책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별이가 외로울 것 같아 한 마리 더 키워볼까도 했지만 식구 하나 는다는 것은 키우는 일도 책임감도 두 배가 되어 절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그래도 사이좋게 뛰어노는 마초와 별이를 보니 강아지도 사회생활이 필요해 보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초와 함께 나서는 두 번째 산책 길이었다. 뒷산에 오른 후 배변을 위해 별이의 목줄을 풀어줬다. 우리의 일상적인 루틴이었다. 여름의 산은 온통 초록으로 뒤덮였고, 둘은 신나게 풀숲을 뒹굴며 뛰어다니더니 눈에서 멀어졌다. 여느 때와 같이 별이를 기다리고 있는데 둘 다 되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5분이 10분이 되고 20분이 됐다. 불안하기 시작했다. 발길이 닿을 수 있는 곳은 모두 돌아다니며 불러보았지만 멀리서 들려오던 바스락거리는 소리마저 사라져 버렸다. 별이를 부르는 내 목소리만 빈 산에 울려 퍼졌다.
날이 저물었다. 배고프면 돌아오겠지 싶어서 별이가 좋아하는 간식도 두고 사료도 넉넉히 챙겨두었다. 밤에는 돌아오겠지 설마. 새벽이면 와있겠지 설마. 그렇게 설마 설마 하며 깜빡 잠이 들었다. 새벽 2시까지도 집은비어있었다. 내가 별이가 되어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를 헤매는 꿈을 꾸다가 벌떡 일어났다. 새벽 6시. 여전히 텅 빈 별이 집을 보니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여름이라 누가 잡아갔나. 차에 치었으면 어쩌나. 좋은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새벽이슬을 헤치며 산에 올랐다. 어제 밤늦도록 개를 잃어버렸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찾아보았다. 개가 집을 나갔을 때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길목에 평소 강아지가 애착을 가지고 있는 물건이나 주인의 냄새가 나는 물건을 놓아두라고 했다. 별이와 내가 자주 오가는 곳에 우리가 사용하는 목줄과 산책할 때 입는 내 운동복을 놓아두었다. 야속하게도 인터넷 속 글에는 24시간 안에 못 찾으면 개는 집에서 점점 멀어져 3일이 지나면 찾을 확률이 희박하다고 나와있었다. 집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별이를 상상만 해도 애가 탔다.
산에서 내려와 차를 타고 동네를 돌기 시작했다. 골목을 내려가다가 시아버지 차와 마주쳤다. 아버지도 일찌감치 별이를 찾으러 나선 것이다.
"아빠, 안 보여요?"
"안 보이네. 별이랑 평소에 어디까지 산책 다녔지?"
"거의 저 아랫동네 다리까지 다녔어요."
"그래, 알았다."
아버지는 산 아래 공사 현장 쪽을 돌아보겠다고 하셔서 나는 자주 다니던 산책길로 향했다. 다행히 아침 일찍 운동하시는 분들이 꽤 계셨다. "혹시 노란색 진돗개 못 보셨나요?" "지나오시는 길에 개 두 마리 못 보셨나요?" 그저 강아지 못 봤냐고 물어보는 말일뿐이었는데 목이 탁 막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아침에 여기 두 바퀴 돌았는데 못 봤어요. 어째. 강아지 잃어버렸나 봐."
그날은 내 오랜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 약속한 날이었다. 코로나로 오랫동안 못 봤던 친구들인 데다가 각자 1호, 2호 아이들까지 모두 함께 만나기로 했다. 내 기분 때문에 반년만의 만남을 망칠 수 없었다. 마음을 굳게 먹고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머릿속은 온통 별이 생각뿐이었다. 오늘까지 안 돌아오면 인터넷의 힘을 빌릴 작정이었다. 목줄을 풀어 준 내 손이 원망스러웠다. 모든 게 내 탓인 것만 같아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눈은 웃지 못하고 입만 웃었다. 한참을 놀다가 그 희한한 표정을 친구들이 눈치채고 말았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는데 옆에서 아들이 "우리 별이 어제 없어졌어요. 그래서 엄마 어제 울었어요!" 했다.
24년째 개엄마인 친구가 처음 뱉은 말.
"별이 남자 친구 생겼어?"
눈이 희번덕 뜨였다.
"응! 남자 친구 생겼어! 그게 왜? 남자 친구 생기면 집 나가는 거야?"
"애들 발정기에 한 번씩 그래. 잠깐 나갔다가 집에 올 거야. 별이 원래 집 잘 찾아오지?"
와. 발정기라니. 생각도 못했다. 이렇게 무지해서야. 인터넷에 '진돗개 임신'에 대해 검색해보았다. '아! 그게 생리였구나!' 몰라도 몰라도 어쩜 이렇게 모를 수가 있을까. 발정기 때 암컷이 풍기는 냄새는 2km까지도 퍼진다고 한다. 암컷의 냄새를 맡은 수컷들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암컷을 찾아다니거나 평소보다 더 짖는 등 이상 행동을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집에 며칠 동안 낯선 개가 찾아왔던 거구나! 마초가 카랑카랑하게 짖었던 것은 다른 수컷 개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한 거였구나! 모든 일들이 퍼즐처럼 맞춰졌다. 둘은 '이때다!'하고 신나게 놀러나간 것이다.
마음이 조금 놓였다. 이유가 있었던 거라니. 집순이 별이와 집돌이 마초의 낯선 행동이 납득됐다. 집에 도착해서 한 번 더 집 근처를 둘러보고 별이와 마초가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해가 산 너머로 넘어가는 늦은 오후, 별이와 마초가 사라진 시간쯤이 됐다. 전화가 울렸다.
"수람아! 별이 왔다! 얼른 아랫집으로 가봐!" 시어머니의 전화였다.
나는 잠옷바람으로 뛰어내려 갔다. 세상에. 어디를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꼬질꼬질 해져서는 허겁지겁 사료를 먹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나한테 와서 안겼다. 아랫집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마초가 어렸을 적에 집을 나갔다가 3일 만에 돌아온 적이 있었다며 마초의 옛날이야기를 해주셨다. 웃으면서 주인들이 담소를 나누는 사이 이 두 아이들은 찐한 청춘드라마를 찍고 와서 주린 배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얄밉게도 어찌나 밥을 맛있게 먹는지 내가 한 마디 던졌다.
"이 녀석들 신혼여행 다녀왔구나!"
다 같이 웃었다. 신혼여행 일주일 후, 별이는 평소보다 늘어지게 잠을 더 자더니 몸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별이가 엄마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