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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람 Dec 09. 2022

엄마 생각나게 하는 맛

  몇 해전 연예인이 셰프에게 냉장고를 부탁하는 프로그램을 즐겨보았다. 셰프들이 냉장고 속 재료를 이용해 15분 만에 출연자가 만족할만한 음식을 만들어 경쟁하는 구도의 프로그램이었는데 당시에 꽤 인기 있었다. 그중 출연자로 박철민 배우가 나왔던 편이 퍽 인상적이었다. 박철민 배우는 알츠하이머 병을 앓고 계신 어머니의 안부를 전하며, 지금은 맛볼 수 없는 그리운 엄마의 음식들을 이야기하며  다시 한번 그 맛을 느끼고 싶다고 했다. 곧 박철민 배우의 냉장고 속 재료로 요리가 완성되었고, 박철민 배우는 셰프가 만든 조기매운탕과 카스텔라를 먹고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을 울고 나서 한 말은 "이 순간을 멈추고 싶어요"였다. 출연자들도 울고, 방송을 보던 나도 울었다.


  음식에는 기억을 유지시키는 강렬한 힘이 있다. 음식을 먹을 때는 다양한 정보가 입력된다. 음식의 맛과 향, 시간과 장소. 음식을 만들어 준 사람과 함께 먹은 사람, 그날의 날씨와 기분까지 말이다. 음식과 함께 입력된 정보들은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장기기억 저장소에 자리 잡는다. 당신이 먹은 어떤 음식은 당신도 모르게 잊히지 않게 되었다.




  나에게도 옛 기억을 통째로 소환시키는 음식이 있다.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던 시절, 친구들마다 매번 싸오는 단골 반찬이 있었다. 엄마가 싸 준 반찬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했던 것은 엄마가 빚은 김치만두다. 김치만두를 싸오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만두 두 개는 늘 보온 도시락 맨 아래칸에 있었고, 엄마의 김치만두는 친구들에게도 인기 만점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반찬 고민을 줄이기 위해서였던 것 같지만 엄마는 만두를 한 번에 많이 만들어서 냉동실에 넣어두었다. 


  만두를 빚는 날이면 엄마 옆에 꼭 붙어서 엄마가 만두 만드는 걸 지켜봤다. 엄마가 부추며 두부, 당면, 고기, 김치를 넣고 소를 비빌 때면 '어쩜 저것들이 모며 만두 맛을 내는 걸까?' 신기해했다. 엄마는 나를 조수 삼아 만두소를 만들었다. "소금"하면 내가 소금을 집어 뿌렸고, "설탕"하면 설탕을 집어 뿌렸다. 엄마가 "그만"하면 뿌리기를 그만뒀다. 엄마가 간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면 그제야 마음이 놓이면서 조수 역할을 잘한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그리고는 엄마의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만두피를 만들 때는 엄마가 나를 좀 귀찮아했다. 만두피를 만들려면 밀가루 반죽을 밟기도 하고, 주무르기도 해야 했다. 어느 날은 엄마가 반죽을 밟으라고 시켰는데 그 위에서 방방 뛰다가 비닐이 터지는 바람에 된통 혼이 났다. 널찍한 나무 도마에 밀가루를 뿌리고 밀대로 만두피를 는데 엄청나게 재밌어 보였다. 엄마는 무심하게 뜯은 반죽을 약간 동그랗게 만든 다음 밀대를 앞 뒤로 몇 번 굴리고 나면 금세 얇고 동그란 만두피가 완성되었다. 나는 아무리 해도 어떤 부분이 뭉뚝해져서 그걸 또 펴려고 하면 동그란 모양이 망가져버렸다. 집에 밀대가 하나뿐이라 깍두기인 나는 빈 소주병으로 밀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만두를 빚는 시간이다. 나는 엄청나게 뚱뚱하거나 기다란 만두를 만들거나 뿔을 달거나 빗금을 치거 나하는 나만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더했다. 바닥에 소를 다 흘린다고 늘 타박을 받았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사실 손끝으로 상상한 것을 만들어내는 일은 나이 불문 흥미로운 일이 아닌가. 요즘 엄마들은 밀가루 놀이며, 클레이며 돈을 들여 아이들 체험 활동을 시키는데 돌아보면 어릴 때 송편 빚고, 새알 반죽하고 했던 것이 전부 촉감놀이였다. 여기에 더해 송편이 쪄 나오는 순간, 혹은 내가 만든 새알 반죽이 팥죽 위로 떠오르는 순간! "내 거다!"하고 외치는 기분이란! 내가 만들었으면 내 작품이다. 동생과 나는 각자의 작품을 골라 맛있게 먹었다.


  어릴 때 엄마는 인형놀이나 병원놀이 같은 것에 응해주지 않았다. 늘 말이 고팠던 나는 말 수 적은 엄마 대신 또래 친구들을 사귀어 밖에서 놀고 들어왔다.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는 엄마를 보고 있는 시간이 엄마랑 노는 시간이었다. 엄마가 나를 조수처럼 부려주기만 기다렸던 그 시간. 싱크대는 가슴팍까지 오고, 엄마를 올려다봐야 했던 그 시절. 요란함 없이 조물조물 뚝딱, 맛난 요리를 척척 해내는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멋졌다.




  영화 <라따뚜이>(2007)에는 혹독한 음식 비평가 '안톤 이고'가 생쥐 '레미'가 해준 라따뚜이를 먹고 눈을 번쩍 뜨는 장면이 나온다. 안톤 이고가 레미의 라따뚜이를 입에 넣는 순간 안톤 이고가 앉아 있는 곳은 그의 고향집 식탁으로 변한다. 노을 지는 저녁 시간 엄마는 부엌에서 분주하고, 이제 막 음식을 만드는 따뜻한 기운이 그대로 남아있는 식탁 한가운데에 앉아서 엄마가 해 준 라따뚜이를 먹던 어린 자신이 떠오른 것이다.


영화 <라따뚜이>의 한 장면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엄마, 엄마는 외할머니가 해 줬던 음식 중에 뭐가 제일 다시 먹고 싶어?" 

  

  엄마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홍어애탕"


  예전에 홍어 음식으로 유명한 지역에 갈 일이 있어서 홍어애탕을 먹으러 들어갔는데 그때 그 맛이 안 났다면서 이야기하셨다. 온 가족이 홍어를 좋아해서 외할머니가 홍어애탕을 끓이면 구 남매가 둘러앉아 그릇 긁는 소리가 나도록 먹었다고 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이다. 엄마가 홍어애탕을 좋아했는지도 몰랐다. 솔직히 말하면 홍어에 '애'라는 부분이 있는 줄도 몰랐다. 엄마에게도 김치만두 같은 음식이 있었구나.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엄마에게 맛있는 홍어애탕을 사드리고 싶다. 엄마도 그리운 엄마를 만날 수 있도록 그때로 돌아갈 수 있게 해드리고 싶다.


  짧지 않은 인생. 참 많은 음식을 먹고살았다. 맛집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비싼 호텔 레스토랑에도 가봤다. 그래도 우리는 인생 최고의 음식을 꼽으라고 하면 늘 엄마가, 아빠가, 할머니가 만들어 준 음식을 떠올린다. 


  음식은 시간의 장벽을 허문다. 타임머신처럼 우리를 그때로 데려가 준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음식의 힘. 그 힘을 생각하면서 오늘도 저녁 메뉴를 고민한다. 비록 아이들이 엄마가 해 준 음식 중 가장 맛있었던 음식을 떠올리라고 하면 '라면'을 떠올릴지라도. 훗날 아이들의 타임머신이 되어 줄 음식을 생각하며 제법 비장하게 라면을 끓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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