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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람 Dec 21. 2022

나의 멍청함을 소중함으로 바꿔준 엄마의 한마디

  최근에 알게 되어 쓰게 된 말 중에 입에 착 달라붙는 단어가 있다. 바로 '멍청비용'이다. 멍청비용은 조금만 주의했다면 쓰지 않았을 비용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를 들어 할인 기간을 놓친 후 물건을 제값 주고 사거나 주차위반이나 속도위반 같은 과태료,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나가지 않았을 은행 수수료 같은 것들 말이다. 멍청비용을 쓰고 나면 보통은 짜증이 동반된다. 그런 감정은 대체로 나를 향해 있고, 자책 끝에 스스로를 '이 똥멍청이!' 하며 비난하고 만다. 


  들여다보면 멍청비용에도 단계가 있다. 1단계는 '아차'하는 타이밍으로 돈을 쓰거나 혹은 못쓰게 되었을 때다. 택시에 타자마자 내내 기다리던 버스가 올 때, 흐린 날 현관에서 우산을 들고나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안 들고 나왔는데 비가 와서 새 우산을 사야 했을 때, 할인 카드가 안 보여서 할인 안 되는 카드로 결제해야만 했을 때, 어제까지 기억하고 있던 구독권 종료날짜를 놓쳐 해지를 못했을 때, 오늘까지 사용해야 하는 쿠폰을 못쓰고 날렸을 때 같은 경우다. 전문용어로 '아까비'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1단계의 경우 다소 소액이라 탄식을 일으키는 정도에서 받아들인다. 


  멍청비용 2단계는 '주의력 결핍'으로 비용이 발생하는 경우이다. 핸드폰을 떨어트려서 액정이 깨지는 일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지난봄 벚꽃 아래서 인증 사진 찍는다고 핸드폰을 꺼내는데 액정이 콘크리트를 향해 다이빙하고 말았다. 액정이 와장창 깨진 것은 물론 터치 기능까지 망가져서 다시 핸드폰을 사야 했고, 2022년 최대의 멍청비용 지출로 기록되었다. 할인받으려고 조기 예매한 숙소나 공연 날짜를 잊어버려서 못 가는 경우도 있다. 또 일정변경으로 탑승하지 않는데 미처 취소하지 못한 기차표나 버스표도 있다. 아휴, 생각만 해도 아깝다. 2단계는 '똥손'이나 '똥 같은 기억력'과 관련이 깊고, 비용의 규모에 따라 침대에 누워 이불킥을 하게 되기도 한다. 이쯤 되면 자신의 멍청함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된다.


  3단계는 과태료로 분류해 본다.(운전자가 내는 대부분의 과태료는 교통법규위반과 관련한다) 어떤 운전자가 오늘은 '신호를 위반해야겠다'하는 의지를 가지고 위반을 할까. 그런 경우는 없다. 신호도 얼결에 과속도 얼결에 하고 만다. 급하게 속도를 줄이지 못하니까 혹은 교차로 한가운데 차를 세울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다. 50km 속도위반 카메라를 머리 위로 지나치며 '에이 설마 지금 나 59km 정도였겠지'했는데 위반속도 61km로 찍혀서 과태료가 날아오면. 아뿔싸.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다. 점심시간 주정차 허용구역에 주차를 하고 식사를 하고 나왔는데! 세상에 2시 10분에 촬영이 되어 불법주정차 과태료 나왔다. 희한하게 커피값 밥값은 척척 쓰면서 과태료는 왜 이렇게 아까운지. 그래도 어쩌랴. 61km로 달린 것도 2시 10분에 주차를 해놓은 것도 난데. 이 똥멍청이!




  꽤 오래전 일인데 중앙선 침범으로 9만 원짜리 과태료 고지서가 날아온 적이 있었다. 초보 딱지를 못 뗀 병아리 운전자 시절이라 교통법규를 어겼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아무리 떠올려도 당최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대체 내 차가 중앙선을 넘고 있는 이 컬러풀한 사진은 어디서 찍힌 거지? 



  '가만있어 보자. 7월 22일? 금요일? 오후 5시?'

  '내가 어딜 갔지?'

  '뭐 하러 이 시간에 돌아다녔지?'


  그때 '띠리링' 하고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OO장난감대여소입니다. 내일은 장난감 반납일입니다."


 '아! 금요일 5시 장난감 반납하러 갔구나!'


  거짓말처럼 그날의 장면이 촤라락 떠올랐다. 


  사연인 즉 그날 아침부터 장난감대여소에 장난감을 바꾸러 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다음 주에 반납하면 연체료 내야 하는데......' 장난감 대여소는 평일 6시까지만 운영하기 때문에 5시가 가까워져서야 천 근 만 근 한 엉덩이를 들고 집을 나섰다.


  장난감대여소까지 빨리 갈 수 있는 터널을 타려면 유턴을 한 번 해야 한다. 그곳의 1차선은 좌회전 신호가 유난히 짧고 유턴 차량과 좌회전 차량이 뒤섞여 늘 차가 길게 늘어서있는 곳이다. 나는 유턴 가능 구역인 흰색 점선 바로 뒤 중앙선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 좌회전 신호로 바뀌었고 앞차들이 유턴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맨 앞 차부터 차례로 유턴을 하는 것이 아니라 뒤쪽에 있는 차들까지 동시에 차를 돌리기 시작했다. '어, 뭐지?' 초보인 나는 얼결에 반사적으로 유턴을 해버리고 말았다. 유턴 차선 바로 뒤. 에. 서.


  그래봐야 빼도 박도 못하는 중앙선 침범이지만 연체료 천 원 안 내겠다고 무슨 짓을 한 건가 싶어 너무 속상했다. 9만 원이면 장난감대여소에 빌리러 다니는 장난감을 아이에게 몇 개는 사줄 수 있는 돈인데. 저녁 내내 우울했다.


  밤에 친정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자 엄마는 무슨 일이냐고 물어왔고, 여차저차 과태료 이야기를 전하다가 울먹이고 말았다. 


  "엄마 나 진짜 바보야. 천 원 안 내려다가 구만 원을 길바닥에 버리게 됐어. 구만 원이면 왜 이렇게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거야? 돈 아까워 죽겠어"


  한참 딸의 푸념을 듣고 있던 엄마가 조용히 한 마디 건넸다.


"수람아, 더한 사람도 죽고 사는 게 인생이야. 속상해하지 마. 엄마는 네가 지금 옆에 있어서 행복해."


  눈물이 핑 돌면서, '다행이다. 나 지금 사랑하는 우리 가족과 함께 있구나.'싶었다. 엄마의 마법 같은 한 마디에 아깝기만 했던 9만 원과 우울했던 기분이 한꺼번에 날아가버렸다. 


  여전히 나는 크고 작은 멍청비용을 쓰면서 산다. 어쩌다 심하게 멍청한 나를 자책하다가도 오래전 그날 엄마가 해준 말을 떠올리면 마음의 짐이 조금 덜어진다. 나에게 진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느끼고, 내 곁에 머무르는 것들을 떠올린다. 스쳐 지나가는 것들에 감정을 쏟고 살기에 우리 삶은 너무도 찰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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