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람 Aug 17. 2022

김밥은 언제 쉬워지나요?

  맘 카페를 둘러보다 보면 '냉장고에 김밥 재료가 좀 있길래 김밥 싸 봤어요' 하는 글이 종종 보인다. 무슨 이런 심상한 말이 있나. '있길래 싸 봤다'는 흐름은 나에게 도무지 있기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김밥 재료가 있기로서니 김밥이 그렇게 쉽게 만들 수 있는 음식인가. '김밥을 한 번 싸 볼까?' 하는 의지의 발현부터 '싸는 행동'을 하기까지 3주는 걸리는 내가 보기에 '있길래 싼' 김밥을 예쁜 그릇에 담아 먹음직스럽게 사진까지 찍어 맘 카페에 올리는 그들은 주부 레벨 천상계 어디쯤에 있다.


  김밥을 떠올리는 사람들을 보면 저마다 사연도 다양하다. 나는 '김밥'하면 소풍날 아침, 온 집에 참기름 냄새 솔솔 풍기며 부엌에 서서 김밥을 싸는 엄마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엄마는 한때 분식집 사장님을 꿈꿨고, 한동안 김밥집에서 일하며 전문가에게 레시피를 전수받았다. 그 덕에 나는 소풍날이 아니어도 간식으로 김밥을 먹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창업 준비를 하면서 엄마는 엄마만의 비법까지 개발했고, 종국에 엄마의 김밥은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 지금은 먹어본 지 오래됐지만 엄마의 '누드김밥', '묵은지 김밥', '어묵김밥', '꼬꼬 김밥'(김밥을 싸면 닭 볏 모양이 나옴)은 그저 후루룩 말 수 있는 메뉴가 아니었다. 그리고 엄마는 김밥을 쌀 때마다 나를 뒤에 두고 김밥을 쌀 때 모든 재료는 따로 볶거나 절여야 한다며, 김밥은 손이 많이 가고 고생스러운 음식이라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하셨다. 그렇게 김밥은 나에게 결코 쉬울 수 없는 음식으로 새겨졌다.


  그리고 희한한 병(?)도 같이 얻게 되었다. 엄마 김밥이 아닌 김밥을 못 먹게 된 것이다. 열 살 때쯤 입맛이 변하면서 잘 먹던 고기도 못 먹게 되고, 비위가 심하게 약해졌다. 약해진 비위는 다른 친구들이 싸온 김밥을 못 먹는 지경까지 갔다. 깨끗한 우리 집 부엌에서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본 '엄마 김밥'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번은 마음의 준비 없이 다른 친구 김밥을 집어먹었는데 분홍 소시지가 들어가 있었다. 씹는 순간 당황스러운 식감과 향에 놀라 속이 뒤집어졌고, 그날 점심도 제대로 못 먹고 소풍 내내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오고 가는 김밥 속에서 우정 대신 토가 나오다니. 그날 이후 나는 김밥 교환을 절대 하지 않았다. 지금 돌아보면 웬 육갑을 떨었나 싶지만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조금씩 나아졌으니 나에게는 꽤 힘든 시간이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우영우가 '아빠 김밥'만큼은 재료를 확인하지 않고 세로로 세워서 먹는 장면이 나온다. 우영우도 분명히 나와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인생 처음으로 내손으로 김밥 싼 날이 기억난다. 요리 똥손인 내가 김밥에 도전하게 해 주신 선생님이 계시는데 그분은 우리 엄마도 아니고, 시어머니도 아니고 '백 선생님'이다. 꽤 오래전 프로그램이기는 하지만 백 선생님이 제자들을 모아놓고 집밥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을 즐겨봤다. 프로그램이 방영할 당시는 요리에 심취해서 못하는 솜씨로 이것저것 만들다가 손 여기저기를 칼로 베일 적이었다. 백 선생님이 <김밥 편>을 한다는 예고를 보고, 그 어려운 김밥을 선생님은 어떻게 가르쳐주실까 기대 가득 본방 사수했다.

  

  속 재료를 준비하는 과정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딱 한 가지! 백 선생님은 김밥을 동글동글 마는 게 아니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아래쪽 끝에 있는 밥과 위쪽 끝에 있는 밥이 만난다는 생각으로 갖다 붙이라고 하셨다. 갖다 붙이다니! 김발이 없으면 절대 김밥을 쌀 수 없는 줄 알았는데! 참기름으로 밥을 코팅하고, 소금 간을 해서 밥을 김 위에 얇게 고루 펴고, 속을 넣고, 이쪽 밥 끝과 저쪽 밥 끝이 만나도록 갖다 붙이니...... 동그란 김밥이 되었다! 내가 김밥을 만들다니! 내 인생에 없던 '김밥'이라는 인피니티 스톤을 얻은 기분이었다. 비록 재료 준비하는데 2시간, 싸는데 1시간, 치우는데 1 시간. 4시간은 투자해야 겨우 먹을 수 있는 음식이기는 했지만.




  김밥 싸는 법을 터득했다고 해서 자주 싸는 것도 아니고, 김밥 싸는 시간이 줄어든 것도 아니다. 나는 칭찬에 약한 사람이다. 아이들이 "엄마 김밥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엄마가 싸 주는 김밥 먹고 싶어"같은 꿀 바른 말을 하면, 무장해제되면서 '김밥 한 번 싸줘야겠다'하는 무리한 생각을 하게 된다. 이번에도 고도의 전략에 휘말렸다. 여름 방학 때는 김밥 한 번 싸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방학 3주 만에 드디어 실행에 옮겼다. (김밥 싸는 시간 4시간에서 3시간으로 줄어든 나 칭찬해) 집밥 정선생 김밥 공장 가동!



  집 구조상 부엌으로는 에어컨의 냉기가 닿지 않는다. 선풍기 바람도 식히지 못한 땀이 등허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심심해하는 아이들에게 깻잎도 따오라고 하고, 햄이랑 당근도 볶아보라고 하고, 재료도 하나씩 올려달라고 하니 평소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김밥 싸기 마지막 단계에 가면 재료가 얼마나 남았는지 신경 쓰게 된다. 남은 속재료의 개수에 따라 말 수 있는 김밥 줄 수가 달라지는데 이 날은 단무지가 부족할 것 같았다. 마지막에는 남은 단무지를 반으로 쪼개고, 조금 남을 것 같은 맛살은 하나씩 더 넣었다. 그렇게 김밥 재료를 깔끔하게 소진하면 테트리스를 하다가 마지막 비어있는 한 칸에 긴 막대기가 내려와 모든 줄을 깬 것처럼 뿌듯하다. 아이들과 남편은 김밥 한 알씩 집어 먹을 때마다 엄지 척을 날려줬고, 나도 집어먹은 꽁다리만으로도 배가 터질 것 같았다. 오랜만에 먹는 집 김밥에 다들 손과 입이 바빴다. 고진감래가 따로 없다.


  명절 음식 하듯 반년만에 솜씨 발휘한 집밥 정선생의 김밥은 시댁으로 친정으로 다섯 줄씩 배달됐다. 친정에 전화해서 "엄마, 김밥 쌌어. 이따 5시쯤 갖다 줄게요." 했더니, "아유, 이 더운데 무슨 김밥을 쌌어!" 타박하는 소리가 돌아왔다. 뭐지? 왜 이 말이 감동이지? 김밥 맛있다는 말보다 나 고생했다는 말이 더 듣기 좋은 이유는 싸는 동안 너무 덥고 힘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밥 싸는 고생을 아는 엄마가 내 공력을 알아줘서 더 좋았다. 주부 10년 차에도 김밥 초보인 나의 하루가 갔다. 또 모르지. 10년쯤 더 흐르면 '김밥 재료가 있어서 쌌다'는 고단수가 될지. 여전히 나에게 김밥은 난이도 '상'이다.

이전 01화 엄마 생각나게 하는 맛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