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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Mar 12. 2023

고유명사로서의 삶과 그 한계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최진석


최진석 교수의 책은 두 번째다. <탁월한 사유의 시선>이라는 책을 통해서 그를 처음 만났고 ‘스스로 생각하는 삶’을 살라는 메시지에 묵직한 자극을 받았다. 스스로 생각하며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생각대로 살고 있는지 성찰하는 기회였다. (브런치 리뷰 링크)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은 <탁월한 사유의 시선>보다 먼저 발간되었던 책으로 최 교수의 EBS 인문학 특강 내용을 담았다. 제목처럼 노자의 철학을 바탕으로 스스로 생각하는 힘, 자기답게 사는 삶에 대해 강조한다.


그의 메시지는 독자를 가슴 뛰게 하는 힘이 있다. 나의 가치와 존재감을 고양시키며 나의 고유한 욕망을 발산시키고 싶은 열망을 심는다. 그 열망을 쫓는 삶이 나의 행복은 물론, 국가의 발전을 이끈다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웅장(?)해지는 느낌도 든다.


그런데 이번 책을 읽으면서 그의 생각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이 들었다. 노자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그의 메시지에 상당 부분 공감하면서도 결국 ‘자아의 욕망’을 강조하는 결론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거대한 이데올로기나 신념이라는 획일화되고 폭력적인 질서가 아닌, 개인의 생각을 존중하고 자율성을 부여하는 질서에는 공감한다. 하지만 개인의 욕망을 우선순위화 하는 사회 시스템이 노자가 강조했던 ‘자연의 질서’에 과연 부합하는 것일까? 자연이야말로 bottom-up이 아닌 top-down으로 만들어진 질서인데 말이다.





바람직한 삶이 아닌, 바라는 대로 사는 삶

  

책에서 언급된 노자 철학의 몇 가지 포인트를 짚어보면 아래와 같다.


모든 가치는 중립적이다. 보편적 가치/이념 체계는 선악 여부와 관계없이 배제와 폭력을 낳을 뿐이다.

인간의 주관성(가치)을 탈피해 자연의 질서가 보여주는 객관성(사실)으로 나아가야 한다.

세계는 ‘실체’로 존재하지 않고 ‘관계’로 존재한다. 대립적인 것들의 상호의존적 관계로 존재한다.(有無相生)

세계의 실상은 경계가 모호하다. 진실은 확신하기 어려우며 긴장 상태에 있다.

변화하는 세계에 적응하려면 세계를 ‘보고 싶은 대로’가 아닌 ‘보이는 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無爲)


오랜 기간 인간의 역사는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기보다 보편적이고 단일한 세계관과 가치관을 통해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 이는 신분제도나 중세종교와 같이 개인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훼손하고 억압하는 방식이었다. 노자철학은 이러한 보편적 신념 체계를 거부한다. 세계의 움직임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그 세계 안에서 자기의 고유한 의미를 만들어가는 삶을 강조한다. 책의 메시지를 아래에 직접 인용해 본다.


출처: Unsplash의 Gabriella Clare Marino


원래 철학은 ‘시대를 관념으로 포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의 주도권은 항상 세계 자체에 있어요. 이론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세계가 어떤 형태를 띠고 움직이는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지를 감지하고, 그 안에서 인간은 어떤 유형의 인간으로 자기 삶의 의미를 구현하는지를 가늠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어떤 이론을 가지고 있는지, 나에게 어떤 믿음 체계가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세계가 움직이는 방향에 대해 어떤 궁금증을 가졌는지가 더 중요하지요.


노자는 바람직한 것을 모두 똑같이 수행하는 사회보다 ‘바람직한 것’을 없앤 후 각자 바라는 바를 다양하게 수행하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가 더 강하다고 봤습니다. 해야 하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다양한 사람들로 이뤄진 나라가 더 부강하다고 봤어요. ‘바람직함, 해야 함, 좋음’은 바로 사냥꾼이 정해놓고 내달리는 목표물과 같은 격이지요. 마치 사냥을 하듯이 이런 목표물을 향해서 내달리도록 구조화된 사회는 사람들의 마음을 미치는 지경으로까지 내몰 수 있다는 뜻입니다.   





책을 보면서 들었던 의문점은 이렇다.


첫째, 자연은 정말 가치중립적일까? 오늘날의 기후위기는 자연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보편적인 가치가 있음을 반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도 개인의 욕망보다 우선해야 하는 공동체적 가치가 있는 것 아닐까. 개인의 욕망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인류의 생존기반 자체가 무너질지 모른다.


둘째, 세계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정말 가능할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환경(사람, 경험 등)과 상호작용을 시작하며 인식의 틀을 구성한다. 관념과 주관을 완전히 벗어난 세계 인식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저자의 말처럼 이론과 믿음을 벗어난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존재할까. 자아의 욕망을 인정하고 성취하기 위해 세계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뿐 아닐까.


출처: Unsplash의 Markus Spiske



고유명사에는 한계가 있다


아직까지 개인의 다양성이 제약받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최진석 교수의 메시지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그의 욕망 지향적 마인드는 조심스럽다. 우리는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상호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자본의 욕망에 크게 영향받는다. 주식, 부동산, 코인 열풍과 같은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삶에 대한 다양한 가치관이 형성되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개인의 욕망은 결국 자본주의 관점에서 적용되기 쉽다.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쓰고 더 편리하고 안락한 삶. 이러한 욕망의 확대는 기후위기처럼 인류의 지속가능성을 훼손한다.


개인의 행복과 욕망을 강조하는 최진석 교수의 메시지가 공동체에 미치는 문제들을 생각해야 한다. 고유명사로서 개인에 집중하는 것보다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상호의존적 관계에 집중하는 것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무위(無爲)적 관점에 가깝지 않을까. 고유명사만 존재하는 언어로는 소통할 수 없다. 서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어휘들이 풍성히 존재할 때 비로소 나를 드러내는 고유명사가 의미 있는 것이다.




*커버이미지: Unsplash의 Viktor Forga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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