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로 내려가는 저녁

by 소원상자

빛은 번호를 달고
콘크리트의 폐 속으로 떨어진다.


번호로 구획된 공간 안에서
사람은 잠시 이름을 잃고
차와 함께 하나의 위치가 된다.


B1, B2, B3 같은 표식들은
목적지를 안내하기보다는
지금 내가 얼마나 내려와 있는지를
확인시킨다.


지상에서의 하루는
늘 위를 향해 있었다.
해야 할 말과
지켜야 할 태도와
스스로를 증명해야 했던 순간들이
겹겹이 쌓이며
소음을 만들었다.


그러나 지하주차장에 들어서는 순간
생각은 자연스럽게 낮아지고
천장은 그 이상의 높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마음마저도
자신의 부피를 다시 계산하게 된다.
똑바로 서 있던 생각조차
허리를 굽혀야 한다.


공기는 무겁고 냄새는 솔직하다.
배기가스와 습기, 오래 머문 한숨들이 섞여
이곳만의 시간이 층을 이룬다.
차 문을 닫고 몇 걸음 옮기면
발소리가 필요 이상으로 울린다.


지하에서는 작은 움직임도 쉽게 증폭된다.
그래서인지 지상에서 감추어 두었던 마음들이
이곳에서는 쉽게 모습을 드러낸다.
미뤄 둔 말들, 닳아버린 감정들,
정리되지 못한 채 남아 있던 시간들.
헤드라이트가 켜질 때
어둠은 잠시 갈라지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지하의 빛은 언제나 임시적이다.
머무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곧 떠날 것을 전제로 존재한다.
빛조차도 이곳에서는
자신의 역할을 넘어서지 않는다.


지하로 내려왔다는 사실은
다시 올라가기 위해
가장 낮은 곳을 통과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곳은 어둠 속에서 귀환을 준비하는 공간,
위로 향하기 전 잠시 속도를 늦추는 자리.


사람은 가장 낮은 곳에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또렷하게 확인한다.

나는 또 지하로 내려가겠지만
이미 위쪽을 향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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