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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가다의 작은섬 Oct 12. 2022

나를 사랑할 용기「미움받을 용기」- 2편

나만의 심리학

https://brunch.co.kr/@islefree/104






『열등감은 노력과 성장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니까. -중략- 하지만 열등 콤플렉스는 자신의 열등감을 변명거리로 삼기 시작한 상태를 가리킨다네.』

(미움받을 용기 94p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 타게)     


어릴 적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뱁새가 황새 쫓아 가려고 하면 가랑이가 찢어진다.
사람은 항상 밑을 보고 살아야지 위를 보고 살면 힘들어.’     


뱁새 사진 대신 참새 / 황새

저는 기질 자체가 질투도 많고 경쟁심도 심합니다. 그런 내가 SNS에서 남들 사는 모습을 보니 열등 콤플렉스만 늘어갑니다.


네, 지독히도 열등 콤플렉스가 심했습니다. 지금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보임이 많은 세상에 살다 보니 보고 싶지 않아도 남들이 사는 모습을 봅니다.


네, 부럽습니다.

남들은 가고 싶은 여행도 마음껏 다니는 것 같고, 하나 같이 똑똑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나만 못난 것 같아서 어느 순간부터 내가 가진 것은 너무 보잘것없는 것 같아 보여주는 것에 자신이 없어집니다.


그랬던 제가 브런치 작가가 되고 처음으로 SNS 프로필에 나의 사진을 올렸습니다. 나의 글은 그런(열등 콤플렉스) 것에 얽매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글을 쓰면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에게 질문하고자 합니다.




『건전한 열등감이란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나’와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라네.』

(미움받을 용기 105p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 타게)     


나는 왜 다른 사람을 질투하고 있는가?

나는 왜 다른 사람과 경쟁하고 있는가?

나는 왜 남들처럼 살기를 원하는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생긴 욕구가 진정 내가 바라는 것일까?


빅터프랭클은 말합니다. ‘운명에게, 삶에게, 나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 삶이 나에게 하는 질문에 대답하면서 나 스스로가 삶의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질문이란 밖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향해야 합니다. 열등감, 혹은 성장 욕구, 그것도 아니면 삶의 의미, 그 무엇이 되었든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명언 ‘너 자신을 알라’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항상 ‘내 안의 나’와 대화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지금의 나보다 앞서 나가려는 것이야말로 가치가 있다네.』

(미움받을 용기 107p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 타게)     


지금의 나는 삶의 어디에 있을까요?

그리고 나는 앞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


‘남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부럽다면 나도 열심히 책을 읽으면 된다.’ 한 권, 한 권 책을 읽으면서 날마다 좀 더 나은 내가 되어가는 것이 좋아졌습니다. 아직도 모자라고 더 배우고,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에게서 자유로워지고 싶기 때문입니다’

물론 건전한 열등감을 통해서 나를 발전시키고 성장시키고 싶은 욕구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바라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 이상적인 자아상도 좋지만, 질투도 많고, 경쟁심도 많고, 한시도 가만있지 않고 무엇인가 하기를 좋아하고, 말하기도 좋아하고, 잘 울기도 하고, 이기적이고, 나약하고, ‘버럭’ 화도 잘 내고, 이 모든 것이 나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지만 나의 이런 점이 나를 힘들게 하거나 다른 사람을 해치게 한다면 ‘의미 있는 변화’도 필요할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나는 옳다’고 확신하는 순간, 권력투쟁에 발을 들이게 되네.』

(미움받을 용기 122p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 타게)     


인간관계에서 갈등이 발생하면 너보다‘내가 옳다’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 집니다. 생각에 생각의 꼬리를 붙들면서, 추론과 추론을 반복하면서, ‘내 행동이 옳다’고 스스로 정당성을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역지사지

사실 내가 옳다는 정당성보다는 ‘역지사지’를 먼저 생각하고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서로 다름을 인정한다면 좀 더 나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을 텐데..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요. 아무래도 저는 성인군자는 못되나 봅니다.

하지만, 이제 권력투쟁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갈등이 상황이 발생하면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제 심신이 지치는 일은 멀리하고 싶습니다.


성인군자까지는 못 돼도 나를 해치는 행동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니 한결 평안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유대교 교리에 보면 이런 말이 있네. “내가 나를 위해 내 인생을 살지 않으면, 대체 누가 나를 위해 살아 준단 말인가?”』

(미움받을 용기 154p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 타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나와 맞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쯤은 있습니다. 피한다고 피하지만 같이 일을 하다 보면 갈등이 발생합니다.


갈등이 극에 달하면 괘씸하고, 억울하고, ‘뭐 저런 게 다 있나?!’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면 머릿속에서 온갖 중상모략이 펼쳐집니다. 하루 종일 그 속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하루 종일 바보같이 뭐 하고 있는 거야?’     


속으로 끊임없이 상대를 헐뜯고, 마음속으로 수 십 번을 싸우면서 상대의 삶을 살고 있는 나를 발견했습니다.


며칠 전 법륜스님의 ‘행복’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스님은 상대가 나에게 준 것이 쓰레기라면 빨리 쓰레기통에 버리고 내 삶을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나의 삶을 위해 손에 든 오물은 되도록 빨리 버리고 손 세정제로 세균 하나 남지 않게끔 깨끗이 씻어야겠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할 필요가 있네.』

(미움받을 용기 160p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 타게)     


누구의 과제인가? 아리송하고 헷갈리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일인가? 없는 일인가? 또는 나의 통제 영역인가? 아닌가를 먼저 생각해 봅니다. 그럼 과제의 분리가 한결 쉬워집니다. 

이제 갈등이 일어나면 나의 과제만 가지고 오려는 연습을 합니다. 상대의 감정과 생각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지만 내 생각과 감정은 내가 통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모든 것이 나의 과제라고 생각해서 첫째 아녜스의 과제까지 짐 어지고 살았습니다. 엄마는 그래야 되는 줄 알았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책을 치유의 수단으로) 그렇게 경계 없는 삶이 서로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알았습니다.


내 과제가 아니라고 공부를 하지 않는 아이를 내버려 두라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하는 것은 아이들의 과제이지만, 내가 아이들이 즐겁게 공부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드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동료가 프로젝트 진행으로 힘들어한다면, 그것은 동료의 과제이지만 힘내라고 시원한 커피 한 잔 건넬 수는 있습니다.


과제를 분리하고, 책임의 소재, 통제의 영역을 구분하라는 것은 이기적으로 내 삶만 잘 살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것이라고 저는 이해했습니다.


복잡한 과제가 난무하는 인간 세상, 협력하며 살아간다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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