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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가다의 작은섬 Feb 03. 2023

절대적인 믿음, 초의미 1편「죽음의 수용소에서」

믿는 자에게 의미가 있나니! (2023.1.30. 월)




이번주 주제 : 초의미

명절이 지나고 2주 만에 뵙는 선생님들! 무척 반가웠습니다. 1시간 30분 동안 각자의 생각을 나누며 이야기하는 시간을 통해 저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도 참 ‘기부니가 좋아요’




『파스칼은 가지는 결코 나무의 뜻을 알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빅터 프랭클의 영혼을 치유하는 의사 79p)


『길들여진 동물은 사람이 그를 줄에 묶어 놓은 목적을 알지 못한다. 인간 역시 자신의 삶에 어떤 ‘최종 목적’이 있는지, 전체 세계가 어떤 ‘초의미’를 가졌는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빅터 프랭클의 영혼을 치유하는 의사 80p)


초의미, 굉장히 어렵네요.

이 글을 쓰기까지 굉장히 많은 사유를 했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책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해한 것을 어떻게 글로 풀어야 할지 참 막막하네요. 하지만 의미치료상담사로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차근차근 써 내려가 보려고 합니다.(긴 글을 올릴 때마다 죄송스러운 마음이 올라오네요. 하하)


빅터프랭클이 비유한 것처럼 가지가 나무의 뜻을 모르듯 피투성이로 세상에 던져진 인간 또한 운명의 뜻, 내 삶 전체가 무슨 의미를 지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건 부자나 가난한 자나 똑똑한 사람이나 무지한 사람이나 똑같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삶의 최종 목적은 알 수 없지만 매 순간순간 내 삶의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다가 마지막 순간 ‘내 삶은 의미 있었다.’라고 말하고 싶네요.^^



『‘초의미’는 전체 의미를 더 이상 파악할 수 없는, 파악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선다는 뜻에서다.』

(빅터 프랭클의 영혼을 치유하는 의사 79p)


『‘초의미’는 궁극적인 의미는 인간이 지닌 지적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176p)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실존 철학자들이 가르친 대로 삶의 무의미함을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닌 절대적인 의미를 합리적으로 터득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로고스는 논리보다 심오하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176p)


‘내 삶은 의미가 있다. 내 삶은 가치가 있다는 절대적인 믿음’


그럼 초의미란 무엇일까요? 빅터프랭클의 비유처럼 가지가 나무의 뜻을 알 수 없듯이 인간도 자신의 삶의 전체 의미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저 살아가면서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부분적인 의미만 묻고 답할 뿐이죠.


이리 살아도 한 세상, 저리 살아도 한 세상 어차피 죽을 인생. 덧없는 삶을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다는 절대적인 믿음, 이것이 빅터프랭클이 말하는 초의미가 아닐까요?


로고스는 의미 외에도 영혼을 뜻하기도 합니다. 즉 초의미는 논리나 이성적인 생각을 넘어서는 절대적인 (영적인) 믿음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소아마비 혈청 연구에 사용되는 시험용 원숭이는 끊임없이 주사 바늘에 찔리고 또 찔리는 고통을 겪는다. 원숭이는 과연 자기가 겪는 고통의 의미를 알 수 있을까? 원숭이 지능으로 볼 때, 원숭이는 인간 세계, 즉 고통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세계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175p)


『그렇다면 인간의 세계 외에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더 높은 세계가 있다고, 그런 더 높은 세계의 의미, 즉 초의미가 비로소 인간의 고통에 의미를 줄 수 있을 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빅터 프랭클의 영혼을 치유하는 의사 82p)


인간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고통이지요. 우리는 매 순간 고통 속에서 살아갑니다. 자연스럽게 다스려지는 고통도 있지만, 몇 날 며칠을 고뇌하며 다스려야 하는 고통도 있지요.


그뿐만 아니라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은 고통, 평생을 다스리고 다스려도 이해할 수 없는 고통도 있습니다. 하지만 빅터프랭클은 원숭이가 인간의 뜻을 알 수 없듯이 인간도 운명의 뜻을 다 헤아릴 수가 없지만 인간이 겪는 고통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고통이 내 삶을 힘들게 할지라도 내 삶은 의미가 있다. 내 삶은 가치가 있다'는 절대적인 믿음, 저는 이것이 초의미라고 생각합니다.



학회선생님들에게 초의미란

첫째, 초의미는 관점의 전환. 즉 내 삶의 의미, 그 너머를 보는 힘이다. 한 가지 의미에 꽂혀있으면 그것만 보고 다른 것은 보지 못한다. 즉, 내가 생각했던 관점에서 벗어나면 이해되지 못한 다른 사람의 입장을 볼 수 있고 그를 통해 나를 넘어서고 나의 고통을 넘어서게 된다. 즉, 자기 초월이 가능하다.


둘째, 초의미는 용서, 사랑, 감사다. (해외거주선생님) 알코올 또는 마약 중독자를 부모로 둔 신생아들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영유아시설에 입소한다. 봉사활동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죽을 뻔했지만 살아난 것 자체로 기뻐한다. 그리고 그런 부모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며, 자신의 삶에 감사한다.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한다. 이런 능력, 이것이 초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아이들을 보면 한 살 두 살 된 아이들도 초의미가 있다. 즉, 빅터프랭클이 말한 내면의 힘, 로고스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 같다.


셋째, 초의미는 고통에서 빠져나오는 힘이다. 모든 삶에는 희로애락이 있다. 삶은 사소한 것부터 큰 것까지 고통이 따른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큰 것도 작게, 어떤 사람은 작은 것도 크게, 사람마다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다. 초의미는 고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고 고통에서 헤어 나와 다시 살아가게 하는 힘을 주는 것 같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초의미는 2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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